▲ 박준호(청년국악인)

 학교 수업이 파한 아이가 현관문을 열었다. 신발을 후다닥 벗고, 거실로 들어오며 ‘아빠’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첫째 딸 은형이었다. 은형이가 서 있는 거실에는 이미 둘째 성빈이가 가지고 논 장난감이 곤히 낮잠 자고 있는 주인을 대신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언제라도 놀 준비가 됐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성빈이의 장난감 조랑말은 숨을 고르고 있는 듯 보였다. 거실에는 가족, 손님의 흔적들이 있었다. 그 흔적에 감응하며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이 있는 거실은 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여러 생각과 질문을 하는 공간이다. 나는 이곳에서 해남논단 원고를 썼다. 맞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글을 썼다.
소리꾼이 고수의 북 반주에 맞춰 관객과 현장에서 호흡하듯 구체적인 내 경험을 논단 속에 녹여 독자들에게 이야기했다. 판소리 북 반주를 하는 고수와 다양한 현장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이웃의 모습을 통해 본 여러 분야 고수들의 이야기인 ‘고수와 고수’로 해남논단을 시작했다. 
판소리 완창 무대의 소리꾼과 고수는 ‘그 뒤야 뉘가 알리요, 더질 더질’이라는 마지막 가사로 판소리의 끝을 맺는다. ‘더질 더질’은 시련과 고통 뒤의 행복한 결말을 의미한다. 이제 나는 논단을 통해 독자에게 ‘더질 더질’로 인사를 하려고 한다. 제목은 ‘고수가 되어갑니다’이다.
한 해를 돌아보는 것은 누군가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은 아닐 것이다.
3월, 입학한 딸은 건강하고 씩씩하게 학교생활을 한다. 1학년 5반 친구들과 함께 ‘동백제’에 출연해서 검정고무신 댄스를 멋지게 추는 모습을 봤다. 춤추는 걸 좋아하는 딸은 무대 센터 자리를 지켰다.
나는 1993년 해남문화원 국악교실 1기 출신이다. 4월, 26년 만에 해남문화원에 돌아왔다. 스승의 뒤를 이어 판소리고법을 해남문화원 수강생에게 가르쳤다. 수강생들은 합북 데뷔 공연을 했다. 이로써 그들도 고수가 됐다.
9월, 23명의 장난꾸러기 해남 제일중 학생들을 만났다. 자유학기제 수업 일환이었다. 학생들은 북채를 처음 잡았다. 그들은 고수의 역할과 북 장단을 통해 집중력과 배려, 인내심을 배웠다. 아이들은 제법 고수의 모습을 닮아갔다.
10월, 나는 셋째 아이 출생으로 다둥이 아빠가 됐다. 은형이 보다는 성빈, 성빈이 보다는 성현에게 더 나아진 출산과 양육혜택을 해남군에서 받았다. 아이 낳기 좋은 해남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나 역시 육아의 고수가 됐다.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태어난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11월, 올 봄에 개원한 남도광역추모공원에 아버지의 안식처를 옮겼다. 아버지는 21년 전에 돌아가셨다. 어느덧 장성한 국악 4남매와 그들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깊은 잠을 함께 봤다. 삶과 죽음, 그리고 가족이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되짚었다.
12월, 국악 무대에서 잠시 내려오는 것이 또한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했다. 함께 사는 삶이란 무엇일까. 나와 이웃의 삶속에 여러 질문을 하고 싶었다. 국악, 교육, 가정, 지역문화, 통일, 청년일자리, 육아의 영역으로 확장 되어 주변의 이웃들과 공감하며 살고 싶었다. 소리꾼이 소리를 잘 할 수 있게 돕는 고수의 역할처럼 우리도 주변에 어려운 이웃을 살펴보고, 서로 긴 호흡으로 지역 발전을 위해 노력해보자. 너무 머나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 대문 밖에서, 우리 마을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길이 있기를 희망한다. 그 희망을 마음속에 품은 채, 2020년에는 더 행복하시길. 더질더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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