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남주 교수, 30년간 화원 골짜기 누비며 청자연구
외롭게 주장했던 화원 청자발생설, 청자역사 바꿔

화원청자에 빠져 화원 사동마을 들녘과 골짜기를 누비며 청자파편을 찾아나섰던 1998년 변남주 교수의 모습.  

 우리나라 청자는 어디서 최초 생산했을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상감청자를 꽃 피운 강진군이었다. 그러다 90년대 들어 중부권이라는 학설이 대두됐고 그러한 학설은 지금까지 굳건히 자리잡았다. 중국의 청자기술이 육지를 통해 우리나라 중부권으로 전해졌고 그 기술이 강진군을 비롯한 해남 화원으로 전래됐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20여년 전 이러한 정설에 정면으로 도전한 이가 있었다. 
해남 화원 출신 변남주 교수. 당시 변 교수는 화원면에서 생산된 청자기술은 중부권에서 유입된 것이 아니라 바다를 통해 중국 남방 월주에서 직접 유입됐고 따라서 우리나라 최초 청자도 화원면에서 생산됐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변 교수는 여기에 더해 화원면의 청자기술이 산이면으로 이어졌고 산이면 청자기술이 강진군으로 전해져 고려상감청자 시대를 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변 교수의 주장에 당시 학계에선 눈여겨보지 않았다. 시골변방 향토사학자의 호기로만 여겼던 것이다.  

초등교사의 호기심서 출발

변 교수가 화원청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8년 해남신문에 나온 짤막한 기사 때문이었다. 화원 사동 골짜기로 난을 캐러 간 지역민이 도자기 파편을 발견했다는 기사였다. 기사를 접한지 1주일 뒤 그는 사동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파편들이 주로 어디에서 발견되는지 묻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미친 듯이 화원 사동 들녘과 골짜기를 뒤지고 다녔다. 당시는 초등교사 신분이라 주말과 방학은 온통 도자기 파편 찾기에 썼다. 그런데 놀랍게도 5년 동안 누빈 결과 도요지로 추정되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동 들녘과 전 골짜기에 널려있는 도자기 파편들, 특히 농기계가 손을 덴 논밭 도랑에는 어김없이 파편들이 쌓여있었다. 도자기에 문외한이었지만 파편들을 모아 공부를 시작했고 화원면의 청자기술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고 싶어 중국 월주를 비롯해 일본을 오갔다. 또 강진군을 비롯한 경주 안압지, 시흥 방산동 등 국내 도요지 터를 누볐다. 현장을 누빈 횟수가 더해질수록 해남 화원이 우리나라 청자 시발점이라는 확신도 더해졌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해남신문에 화원면이 우리나라 청자 생산지이고 그 기술이 전국으로 전파됐다는 연재글을 싣기 시작했다. 또 2002년 한국자기의 발전과 계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석사학위 논문을 집약한 글을 「지방사와 지방문화」라는 학술지에 실었다. 물론 이때도 도자기 학계에선 변 교수의 주장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히도 해남군이 관심을 갖고 화원 도요지에 대한 지표조사에 들어갔다. 2회에 걸친 지표조사 결과 90여기에 이른 도요지 터가 발견됐다. 

도요지 파괴 홀로 지켜내

변 교수는 연구에 그치지 않고 도요지 터 훼손을 막는 운동에도 적극 뛰어들었다. 2003년도 화원 오시아노 진입로 도로공사 때 도요지를 관통하는 도로공사를 막기 위해 혼자 싸웠다. 
변 교수의 이러한 노력으로 이 도로는 3번에 걸쳐 선형이 변경되며 공사가 지연되지만 그 과정에서 변 교수는 도굴범으로 신고가 돼 경찰조사까지 받았다. 변 교수가 그때 모은 도자기 파편 70 박스는 현재 해남공룡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향후 초기청자 재현에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될 전망이다. 
화원청자에 대한 그의 집념은 2011년부터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해남군이 한국청자 발생기원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를 연 것이다. 한국 초기청자 연구자들이 모인 가운데 연 이때의 학술대회에서 토론자로 나선 변 교수는 화원이 초기청자 발생지라고 주장하지만 이때도 학계에선 지역민의 호기로운 주장으로만 받아들였다. 그러나 전국의 청자 권위자들 사이에서 토론자로 나섰다는 것만해도 대단한 진전이었다.

한국청자 역사마저 바꿔

화원면의 초기청자가 변 교수의 외로운 주장에서 전국의 이목을 받게 된 것은 지난해 문화재청이 해남 화원과 산이면 도요지를 포함한 강진군과 부안군 도요지를 고려청자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신청을 권고하고 나서면서이다. 이에 해남군은 산이면과 화원면 일대 청자 생산지에 대한 지표조사와 함께 발굴조사 비용을 반영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으로 해남군은 올해 화원 신덕저수지 인근 가마터 1기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가마 길이가 50m를 훌쩍 넘는 전국 최대 크기인 데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없는 최첨단 기술인 불창시설을 갖추고 있음이 확인됐다. 또 출토된 청자 파편들도 중국 월주요 비색 청자를 구현한 당대 최고급품이었다. 
이번 발굴조사로 화원이 한국청자 발생지라는 변 교수의 주장은 탄력을 받게 됐다. 그동안 변 교수는 화원지역에서 나온 도자기 파편을 중심으로 청자발생설을 주장해 왔다. 그런데 최첨단 가마시설이 확인됨으로써 화원의 청자기술이 중국에서 유입됐고 이러한 기술이 산이면을 거쳐 강진군으로 흘러갔음이 속속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지난해 9월 해남군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해남청자 현황과 성격’ 이라는 학술대회와 함께「고려난파선, 해남청자를 품다」 특별전을 열었다. 이때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해남 화원과 산이면에서 생산된 청자를 녹청자가 아닌 해남청자라는 공식 이름을 부여했다. 그동안 강진 상감청자에 비해 질이 낮다며 조질청자 또는 녹청자로 평가받았던 해남산 청자가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얻고 또 당대 최상품 청자였음을 입증받은 것이다. 
화원이 초기청자 발생지이고 화원 및 산이면 생산 청자가 해남청자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한 초등교사의 기나긴 노력이 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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