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황사 주지 금강스님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

미황사를 해남군민의 쉼의 공간으로 만들어온 금강 주지스님이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로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1989년 폐허가 된 미황사를 찾았을 때 앳된 스님이 나를 맞았다. 유난히 미소가 예뻤던 스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다시 찾았을 때 스님의 등엔 지게가 짊어져 있었다. 지금의 미황사는 스님의 지게에서 시작됐다.
스님의 지게 짐이 더해질수록 미황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도 늘어났다. 그 발길 따라 2000년 미황사 한문학당이 열렸다. 한반도 남쪽 땅끝절에서 열린 한문학당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한문학당이 열리던 날, 미황사에 놀러간 난, 아이들의 가사 옷을 빨았다. 그런데 옷이 너무 많았다. 아이들은 전통건축을 이해하고, 단청문양을 그리고, 탁본에 이어 건물 기둥의 한문 주련을 익혔다. 그 한문학당이 올해로 36회를 맞았고 1,600여명이 수료했다.
2002년에는 템플스테이가 시작됐다. 지금은 매년 내국인 4,000여명, 외국인 500여명이 참석하는 우리나라 대표 템플스테이로 성장했지만 당시엔 단어조차도 생소했던 템플스테이였다. 나는 그 단어를 몰래 몇 번이나 외웠다.
2000년 미황사괘불재가 복원되던 날, 머리에 쌀과 곡식들을 이고 오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너무도 정감스러워 울컥했던 기억. 괘불재 준비는 미황사 아랫마을 청년들이 했다. 괘불재 아래에 놓인 곡식과 생활용품 등. 곡식을 제외한 다양한 물품들은 해남읍이나 도시에서 온 젊은이들이 놓았을 것이다. 괘불재 복원으로 보물 1342호인 괘불탱도 복원 모사돼 도시 나들이를 갔다.
우리나라 산사음악회의 시원을 연 미황사 산사음악회, 금강스님의 노력으로 대안학교로 성장한 서정초등학교 학생들이 매년 무대에 오른다. 2003년 전교생 5명으로 폐교 위기에 놓인 서정분교를 살리겠다고 나선 금강스님이 당시 내놓은 노영심의 음악CD, 기금 마련을 위해 너도나도 구매했다. 금강스님 덕에 학교버스도 생기고 지금은 대안학교 모델로 분교에서 초등학교로 성장했다. 
미황사를 찾아가는 길은 금강스님의 탁본을 보러가는 길이다.
1996년부터 미황사 부도전의 비문과 문양들을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시작한 탁본, 이후엔 전국의 사찰과 폐사지를 돌며 탑과 부도의 문양을 탁본했다. 여기엔 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들어선 구산선문 사찰도 포함돼 있었다. 맑고 우아한 탁본은 ‘미황사와 구산선문 탁본전’, ‘천년의 미소’ 등 다양한 이름으로 서울과 광주, 대구 등에서 전시가 됐다. 국내 최초 탁본전이라 대대적인 언론의 조명도 뒤따랐다.
당시 유홍준 교수는 추천사에서 ‘문양탁본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이고, 금강스님의 탁본은 담백하고 예술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특히 금강스님의 비천문양 탁본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 세계문화유산지구인 중국 돈황 막고굴 전시관에서 외국인 최초로 전시됐다. 신라말부터 조선후기까지 1000년의 혼이 탁본으로 되살아 난 것이다.  
미황사 대웅보전의 천불벽화도 이수예 화가의 손으로 모사돼 인사동 나들이를 갔고 응진당 나한벽화도 복원됐다. 
2017년에는 달마고도가 개통됐다. 달마고도는 금강스님이 당시 도지사였던 이낙연 민주당 대표에게 건의해 만들어진 길이다. 공사는 스님의 지도 아래 호미와 곡괭이만 사용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 명품길이 탄생했다.
미황사 자하루 미술관은 전국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전시공간이 됐고 도종환 국회의원 등 숱한 명사들이 강의차 찾는 명소가 됐다. 금강스님의 이러한 제반활동의 바탕에는 공동체복원이라는 정신이 깔려있다. 
문학인들이 쉬어가는 곳, 예술인들이 머물다 가는 곳, 산 아래 아이들이 소풍을 오고 지역민들이 농사지은 공양물 보따리를 바리바리 이고 찾아오는 미황사. 미황사 주지 금강스님이 오는 8일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 대통령상 표창을 받는다. 1989년 앳된 스님이 미황사에서 일궈온 문화유산, 그 바탕에 같이에 가치가 있기에 더 의미가 있는 상이리라. 그래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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