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원 출신 오영석 전 총장

오영성 전 한신대 총장이 등대원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오영성 전 한신대 총장이 등대원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소년의 아버지는 머슴이었다. 아버지는 “공부는 비쩍 마르고 힘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힘좋은 사람들은 일을 해야 마땅하다”며 아들을 중학교에 입학시키지 않았다. 
책가방 대신 소년의 어깨엔 지게가 대신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던 소년은 후배에게 건네 들은 목포유달원이라는 고아원을 무작정 찾아갔다. 버스비가 없었기에 버스 운전수한떼 심한 욕을 얻어먹으면서까지 찾아간 고아원이었지만 가족이 있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고 고하도에 있는 시설도 찾아갔지만 마찬가지였다. 고아원에 들어가서라도 공부만은 해야겠다는 소년의 결심은 무너졌고 또 다시 집에서 책가방 대신 지게를 짊어져야 했다. 
그리고 1년 반 후 동네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가 열렸다. 선생님은 광주에서 간호대학을 다니는 여선생님이었다. 소년은 교회 종지기로 아침저녁으로 종을 쳤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져나왔다. 여성도 배우면 저렇게 큰일을 하는데…
그리고 너무도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배움의 길을 달라고. 그 간절함을 편지로도 썼다. 
“공부하고 싶은 갈증이 나서 못 견디겠습니다. 굶어도 좋고 머슴살이를 해도 좋습니다. 제게 공부할 길을 열어주십시오”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러나 편지를 어디에 부쳐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어린 소년은 주소를 ‘하나님 전상서’라 적고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었다. 편지는 우체국 직원의 손에 건네졌다.
그런데 주소가 하나님 전상서였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던 직원은 편지를 우체국장에게 가져다줬다. 우체국장은 해남읍교회 신자였다. 그는 주저 없이 해남읍교회 이준묵 목사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편지를 받아본 이준묵 목사는 당시 해남읍교회 김찬원 장로를 소년에게 보냈다. 
그리고 1956년 3월6일 소년은 계곡면 사정마을에서 해남읍으로 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소년의 꿈이 열리는 날이었다. 소년은 등대원에서 생활하며 해남고를 졸업해 전남대 의대에 합격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병든 흑인들을 무료로 치료해 준 슈바이처 박사같은 좋은 의사가 되려면, 슈바이처 박사처럼 먼저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신학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했다. 
하나님 전상서 편지로 신학대학교까지 다니게 된 소년은 이후 스위스 바젤로 유학 후 한신대 총장까지 맡게 됐다. 
한편 오영석 전 총장은 지난 6일 해남등대원 70주년 행사에 참여해 질그릇에 담긴 보화라는 설교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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