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군, 10월 중 발굴진행
2009년 이어 두 번째 발굴

해남 민간인들이 집단 학살된 진도 갈매기섬에서 제2차 유해발굴이 진행된다.(2009년 제1차 유해발굴 모습)
해남 민간인들이 집단 학살된 진도 갈매기섬에서 제2차 유해발굴이 진행된다.(2009년 제1차 유해발굴 모습)

 

 6‧25 당시 해남 민간인들의 집단학살장소로 이용됐던 진도 갈매기섬 유해발굴이 진행된다.
진도 갈매기섬 유해발굴은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충북대학교 유해발굴센터에 의뢰해 진행됐는데 14년 만에 해남군에 의해 2차 발굴이 진행된다. 
해남군은 국비 1억5,000만원을 지원받아 10월 안에 유해발굴을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진도 갈매기섬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남경찰이 상부의 지시에 의해 보도연맹원을 몇 차례에 걸쳐 진도 갈매기섬으로 끌고 가 집단학살한 사건이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후인 1946년 11월11일 해남에선 미군정의 곡물공출과 친일파 척결을 주장하는 ‘추수봉기’가 일어난다.
대규모 추수봉기가 일어나자 미군정은 충남부대 등 외부 경찰을 투입해 가담자 체포에 나섰고 추수봉기에 가담한 이들을 강제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키는데 그 수가 600여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6‧25가 일어나자 해남 북‧서부지역(해남읍, 계곡면, 마산면, 산이면, 화원면, 화산면, 삼산면) 보도연맹원들은 관할지서 소속 경찰관에게 연행돼 해남경찰서(해남 식량영단창고)에 구금됐다가 1950년 7월16일 화산면 해창항에서 승선해 진도군 의신면 구자도리 갈매기섬에서 총살됐다. 또 해남 남부지방(현산면, 북평면, 북일면, 송지면) 보도연맹원들은 송지지서와 창고에 구금됐다 같은 날인 7월16일 송지면 어란항에서 승선해 갈매기섬에서 총살됐다. 해남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학살은 이후에도 지속되는데 7월22일 나머지 보도연맹원들을 화산면 해창리에서 집단학살했고 이어 같은해 9월13일 진도갈매기섬으로 시신을 수습하러 간 유족들을 해상에서 사살해 버린 사건 등이다.
​2009년 충북대학교 유해발굴센터에 의해 진행된 유해발굴에선 불에 탄 흔적이 있는 뼈들을 상당수 수습했다. 갈매기섬에서 민간인들을 집단학살한 후 시신을 불에 태운 흔적이다.
유해발굴에선 부위 식별이 가능한 뼈 299점이 나왔는데 이중 왼쪽 허벅지 뼈를 기준으로 가늠할 수 있는 개체 수는 19구, 사망자 수를 50~60명으로 추정했다.
또 유해와 함께 카빈, M1 탄피, 45구경 탄피와 탄두 등이 출토됐다. 
당시 출토된 유해는 모두 남성, 나이는 20대 이하 2구, 20대 11구, 40대 이상 3구, 식별 불가 3구. 키는 평균 167.6cm로 나왔다.
현재까지 진실화해위원회가 해남군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로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53명이다. 
한편 진도 갈매기섬 학살사건은 당시 갈매기섬으로 끌려갔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박상배(산이면 금호리), 박태운(산이면 업자리, 수복 후 부역혐의로 희생), 김영모(현산면 안평리, 수복 때 지리산에서 토벌대에 희생), 고광열의 형(북평면 용운리, 나중에 자연사) 등에 의해 알려졌고 이후 갈매기섬에 가서 시신을 수습한 유가족들에 의해 더욱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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