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옥 군의원

 140명이 사망하고 단 1명만이 생존했던 연호호 침몰사고는 대한민국 5대 해상침몰 사고 중 생존자가 가장 적은 사고로 기록돼 있다. 
연호호는 61년 전인 1963년 1월18일 정오경 영암군 삼호면 가지도 앞 해상에서 일어난 침몰사고로 사망자 140명 중 미수습 희생자도 62명에 이른다. 희생자는 설 명절을 앞두고 목포에서 대목장을 보기 위해 나선 해남 황산, 산이, 화원면 사람들이었다. 

 연호호는 황산면 연호항에서 목포항을 왕래하는 여객선이었고 중간에 황산면 우항포와 문내면 삼덕포, 화원면 별암포를 경유했다. 
그런데 1963년 1월18일 황산면 연호항에서 출발해야 할 연호호가 연호항을 약간 벗어난 곳에서 간척지 벼 150가마를 선적하더니 설 대목장을 보기 위해 배를 기다리던 연호항 승객들을 뒤로한채 연호항을 떠났다. 
연호항에서 승객들을 태우지 않았지만 배의 화물량은 이미 초과된 상태, 그런데 중간 경유지인 우항포와 삼덕포, 별암포에서 기다리던 승객을 모두 승선시키고 또 승객들의 화물도 배에 실었다. 
초과된 화물에 승선 정원수도 86명이 초과된 상태였다. 위험한 항해에 나선 연호호는 결국 종착지 목포항을 20여분 남겨두고 영암 삼호면 가지도 앞 해상에서 불어온 강한 서북풍을 맞아 전복됐다.
배에서 탈출해 널빤지를 부여잡고 허우적거리던 사람들도 추운 날씨 때문에 저체온증으로 대부분 사망했다. 

 그러나 그중 널빤지를 부여잡고 500m 거리에 있던 허사도에 도착한 2명이 있었다. 한 명은 18세의 연호호 주방장이었고 또 한명은 문내면 원문리 서종수였다. 
이들은 허사도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지만 주방장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고 서종수는 허사도 사람들의 노력으로 살아났다. 승선 141명 중 유일하게 생존한 서종수는 문내면 삼덕포에서 승선한 사람이었다. 
140명의 생명을 앗아간 이 사고로 명절을 앞둔 수 많은 유가족들이 목포항으로 달려갔고 정부는 전남 서남권 근해 바다를 샅샅이 뒤지며 시신인양에 나섰지만 매서운 추위와 바람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사망 140명 중 62명의 희생자 시신은 찾지 못했고 침몰된 선체는 1월21일 음파탐지기에 의해 발견돼 설날인 1월26일 인양됐다. 연호호 사건으로 아내와 자식 모두를 잃은 사람, 결혼을 앞두고 사망한 사람 등 수많은 유가족이 발생했다.
유일한 생존자였던 서종수는 이 사고로 전국에 이름이 알려졌고 이후 세무공무원으로 특채돼 해남세무서에서 직세 2계장으로 정년퇴임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허사도 사람과 형제의 연을 맺고 평생 살았다고 한다. 
여객선 연호호는 명진합명회사 소유의 84마력, 34.5톤급의 정기 여객선으로, 정원은 선원 8명을 포함해 86명, 선령은 21년이었다.

 한편 61년 전 1월18일에 일어난 이 사건과 관련 이성옥 의원은 지난 1월19일 해남군의회 임시회 ‘2024년 해남군정 업무 보고’ 자리에서 위령탑 건립을 제안하고 나섰다. 이성옥 의원은 1970년 12월15일 일어난 남영호 침몰 사건은 제주도 서귀포항에 위령탑이 설치돼 민관합동으로 추모제가 진행되고 있고 1993년 10월10일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또한 부안 위도 진리마을에 위령탑이 건립돼 위령제가 거행되고 있다며 해남군에 위령탑 건립을 제안했다. 

 이 의원은 위령탑 건립은 유가족과 원혼을 위로하고 후세들에겐 안전과 생명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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