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재일학자 이원식씨는 일본 교토의 고서점에서 우연히 그림 한 점을 수집했다. 그림은 놀랍게도 1817년 일본으로 떠내려갔던 천불과 대흥사(대둔사) 스님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그림에는 불단에 모신 옥불과 그 앞에서 독경하는 승려가 등장한다. 붓과 종이를 들고 필담을 나누는 스님들도 있다. 더벅머리 총각과 긴 곰방대를 든 뱃사공은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다. 그림 한 장에 표류객의 여러 모습을 담아 영화 포스터를 방불케 한다.
때는 서기 1817년. 대흥사에서는 큰불이 나 천불전이 불타버렸다. 완호스님은 경주 기림사에서 천불을 다시 만들게 했는데 768좌의 불상을 실은 배가 해남으로 가던 중 일본으로 표류한다. 
17명의 스님과 옥불은 가까스로 후쿠오카에 닿았다. 일행은 관례에 따라 조사를 받기 위해 나가사키의 조선관으로 갔다. 화가 우키다 잇케이가 조선인 표류객을 만나고 필담을 나눈 것은 이때의 일이다.
세월은 흘러 1838년이 됐다. 우키다 잇케이가 어느 자리에서 20년 전에 조선표류객을 만났던 이야기를 꺼낸다. 주인은 그때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화가는 기억을 더듬어 그림을 그린다. 그림에는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을 기록하고 대흥사 스님에게서 받은 편지와 두 편의 시도 첨부했다. 편지와 시는 정민교수의 책「다산의 재발견」에 실려있다. 편지의 일부다.
“다만 지난번 주신 말씀만은 지금껏 잊지 못하겠습니다. 그대가 하려는 일이 말인즉슨 옳지만, 어찌 정리라 하겠습니까? 나머지는 다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第向時有所惠之言, 迨今不忘.君之所事, 言卽是, 而何云情裡乎. 餘不多論.)”
편지는 우키다 잇케이가 내비친 모종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정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아마도 차라리 부처님(천불)을 이곳(일본)에 봉안하고 눌러 앉아 중노릇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던 듯하다” 천불전이 일본에 세워질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대흥사 스님들은 일본측의 제안을 물리쳤다. 천불은 그리하여 다시 해남 대흥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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