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방을 아십니까. 20대 이상이라면 모른다고 답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해남의 정보1번지이자 소통의 장소였고 맞선보던 곳이었던 길다방이 문을 닫았습니다. 하나의 다방이 문을 닫았을 뿐인데 참 많은 분들이 아쉬워합니다.
길다방은 어느덧 나이 드신 분들에게 추억의 공간이자 쉼의 공간, 넓게는 문화공간으로서 의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길다방은 저에게도 인상 깊은 곳입니다. 20여년 전 만남의 장소가 부족했던 때 취재원과 만나는 곳이 주로 길다방이었으니까요.
지금 많은 장년층들은 길다방의 역사와 같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곳에서 맞선을 보았고 한일전 경기를 관람했던 장소, 나이 먹어서는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기 위해, 쉼을 위해 찾았던 곳이 바로 길다방이었습니다. 45년여가 지난 길다방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해남의 사회상이 그대로 보입니다.
당시는 만남의 장소가 유일하게 다방뿐이었습니다. 또한 당시는 연애보다는 맞선이 주였던 시절이라 길다방은 맞선보는 장소로 유명했습니다.
해남에서 유명했던 중매쟁이 중 3명이 주로 길다방을 맞선의 장소로 이용했는데 이유는 길다방이 버스터미널 옆이라 만남이 용이하고 성혼의 확률이 높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중매쟁이들은 앞다퉈 맞선 예약을 했는데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하루 5~10건의 맞선이 이곳에서 이뤄졌고 평일에도 1~2건의 맞선이 있었다고 하니 당시 맞선은 사회적 풍조였고 다방이 그 매개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길다방이 맞선 장소였던 까닭에 올해 초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맞선을 봤다는 60대 부부가 추억을 찾아 이곳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예전에도 이곳에서 맞선을 보고 성혼이 이뤄진 이들이 숱하게 찾아오곤 했다지요.
매체의 미발달로 세상과 소통이 어려웠던 시절, 길다방은 해남 여론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해남군청과 경찰서, 교육청 등 기관이 집중돼 있고 해남읍 중심지에 위치해 있던 까닭에 길다방은 해남 모든 정보가 수집되고 흩어지는 창구였습니다. 경찰서 정보2계장은 출근하기 전 이곳에 들러 정보를 파악하는 것부터 하루를 시작했고 기관장들도 정치인들도 이곳에서 정보를 얻으려했습니다.
또한 전문적으로 길다방에서 정보를 수집해 파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로 길다방은 정치 1번지 해남여론 1번지로 통했습니다. 정보는 다음 일을 발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 인간사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이야 언론매체의 발달로 누구나 빨리 정보를 얻지만 그때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빠른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길다방의 여론에 귀를 기울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다 길다방은 기관장들이 저녁식사 후 연례적으로 차를 마시는 장소다보니 언제나 고급정보가 넘쳐 났지요.
고급정보가 모이고 기관장들이 주로 애용하는 장소인 까닭에 길다방의 마담은 미모와 지식을 겸비해야 했습니다. 엄격한 면접을 통해 뽑힌 마담들은 고운 한복을 입고 손님을 맞았다고 합니다.
물론 70년대는 한국사회 대부분의 다방들이 미모의 여인을 채용해야 했습니다. 당시는 인스턴트 커피가 크게 인기를 얻고 있던 때라 이에 대항하기 위해 다방들은 미인계로 차별화 전략을 펴야했지요. 젊은층들에게 인기였던 DJ다방이 활동하던 때도 이때였지요.
길다방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문화도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는 다방에서 위스키와 맥주, 갈비 등을 팔았던 시절입니다. 물론 고급 손님들이 주로 찾았던 메뉴이지만 이곳에서 맥주 만 마셔도 3일 정도는 자랑했고 커피도 맛보다는 멋으로 마시는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사람들은 길다방의 메뉴를 통해 자신의 문화적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음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한마디로 위스키나 커피의 맛보다는 당시 자신의 사회활동의 권위이자 상대적 우월감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길다방은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 길다방 앞은 해남버스터미널(금성여객)과 고속버스 터미널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지금은 광주은행이 들어서 있지만 버스터미널이 들어서 있던 당시에는 길다방 주변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버스. 서울과 광주에서 해남으로 내려오거나 면지역 사람들이 서울 등지로 가려면 해남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차를 갈아타야 했습니다. 진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몇 대 안되는 버스시간을 맞추기란 정말로 어려웠습니다.
도시에서 내려온 사람이나, 도시로 나가려는 사람들은 갈아탈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길다방을 찾곤 했습니다. 새벽부터 다방 앞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들의 기다란 줄이 형성됐고 다방문을 열기가 바쁘게 이들은 쌍화탕과 삶은 계란으로 추위와 배고픔을 달랬습니다.
4~5시간 정도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며 버스시간을 기다렸던 사람들, 그들은 서울로 돈을 벌러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TV가 없던 시절, 길다방은 소극장이었습니다. 특히 한일전 경기는 열기 그 자체였습니다. 면 사람들도 한일전을 보기 위해 이른 아침 집을 나선 후 길다방을 찾았습니다.
모든 집에 TV가 있는 지금도 월드컵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군민광장에 모이는데 TV가 없는 그때는 오죽했겠습니까. 다방에 들어오자마자 선불을 주고 TV앞에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일찍 온 사람이야 의자에 앉아서 보지만 늦게 온 사람들은 서서 보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경기관람에 열중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도 사람들은 함께하는 응원을 통해 하나됨을 확인했겠지요. 장사가 워낙 잘돼 돈을 자루에 담아 다음날 은행에 가져다줬을 정도였던 길다방은 말 그대로 길에 있는 다방이었습니다.
지난 7월말로 문을 닫은 길다방은 쇠퇴 길에 접어든 후에도 장년층의 쉼터역할을 해왔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왕래했던 곳이라 편안하고 찻값이 싸 부담없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곳에 가면 대화의 상대를 만날 수 있어 찾곤 했습니다. 길다방이 문을 닫자 아쉽다는 이들, 누군가 길다방 운영을 이어갔으면 한다는 바람입니다.
길다방을 운영해온 김강수(71)씨도 가게 앞을 지나면 허전함이 너무 크다고 말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도 허전함에 힘이 빠진다는 김씨는 어르신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쉼의 장소로 길다방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합니다. 지금은 다방들의 모습이 많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해남에서 가장 오래된 길다방은 추억의 장소로 오래도록 군민들 마음 속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커피 한잔 80원, 아가씨 월급 1만5000원이었던 시절, 커피와 쌍화차가 주였던 시절, 길다방을 통해 다방문화의 변천사와 찻값 및 다방 차의 변천사를 아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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