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 청자기술 강진 이동 후 고려청자시대 열어
산이 진산도요지에선 최초 상감청자 생산


통일신라 말 한국도자기사에 지각변동이 일어납니다. 화원 뱀사골에 거대한 도요지가 들어선 것입니다.
지표조사 결과 확인된 가마터만 60여기, 우리나라 초기 청자 가마터 중 최대 규모입니다.
그 많은 가마를 만들고 운영한 이는 누구였을까요. 이곳에서 발견된 찻잔은 당시 최고급 자기였습니다. 서민들은 접하기 힘들었을 최고급 찻잔은 또 어디로 팔려나갔을까요.
숱한 수수깨끼를 품고 있는 화원 뱀사골 집단 가마터, 이 가마터가 한국 자기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면? 보통 도요지가 아닐 것입니다.
화원면 신덕리 뱀골마을을 중심으로 분포된 가마터는 1998년 한 등산인이 파편을 수습해 신고함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후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변남주 HK연구교수의 4년에 걸친 조사결과 60여기의 가마터가 확인됐고 2002년 목포대 박물관의 지표조사가 이뤄지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기에 이르지요.
화원면 뱀사골 가마터가 비상한 관심을 끈 데는 전국 최대 규모라는 면도 있지만 강진 청자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청자를 생산했다는 데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화원에서 생산된 청자를 초기청자라 명명합니다.
화원에서 선 보인 초기 청자기술은 강진으로 이동해 고려청자라는 화려한 결실을 맺기에 이릅니다.
서쪽 땅끝인 화원반도에 들어선 도요지, 그러나 당시 이곳은 해상 요충지였습니다. 육로로 봤을 때는 변방이지만 중국과 서해, 남해로 통하는 해상물길과 영산강으로 통하는 강상물길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어 뱃길로서는 최고의 요충지에 속했던 곳이지요.
가마가 들어서기 위해서는 풍부한 물과 땔감, 질이 좋은 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생산된 자기를 운반할 교통입니다. 이곳에서 생산된 자기는 통일신라 말에는 경주로, 고려가 들어섰을 때는 개성으로 운반됐을 것입니다. 또한 차를 주로 마셨던 각 사찰로도 팔려나갔을 것입니다. 이 정도의 가마규모를 운영하고 이를 운송할 배를 소유한 이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아마 거대 상인이었거나 서남해안을 무대삼아 활동한 해상세력이었을 것입니다. 화원 초기청자가 생산됐을 때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추정됩니다. 이때는 중앙권력이 약화되고 지방의 호족세력들이 득세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화원 도요지를 운영한 이도 서남해안을 무대삼아 활동한 호족세력이었을 것입니다.
변남주씨는 통일신라 말 완도 청해진을 무대삼아 활동했던 장보고를 잇는 해상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합니다. 특히 이때는 중국에서 선종이 전래되면서 각 사찰의 찻잔 수요가 무척 늘었을 때입니다.
화원 뱀사골은 골짜기마다 자기 파편이 널려있습니다. 파편 주변에는 땅속에 매몰된 가마터가 있습니다. 파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청자색을 띱니다. 찻잔 밑둥은 해무리굽 모양입니다. 이러한 자기 기술은 어디서 왔을까요. 13년째 화원 초기청자를 연구해온 변남주씨는 중국 월주의 기술이 도입됐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찻잔의 해무리굽 모양은 중국의 도자기 제작 기법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가마는 영암 구림리 도기 가마기술이 전래됐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중국 월주 가마는 벽돌로 만든 반면 영암 구림리 도기 가마는 흙으로 만든 가마였습니다. 따라서 화원도요 세력은 청자제작 기법은 중국에서, 가마제작 기법은 영암의 전통기법인 흙가마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흙가마는 벽돌가마보다 산소의 유입이 거의 없어 질 좋은 자기 생산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청자는 중국에서만 생산된 자기였습니다. 그러나 화원에서 초기청자가 발견되면서 한국에서도 청자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화원에서는 초기청자 뿐 아니라 흑자도 나옵니다. 화원청자가 생산된 시기는 9세기에서 10세기입니다. 그러나 화원도요지는 11세기 들어 자취를 감추고 산이면 진산리 일대에 106기의 거대한 도요지가 들어섭니다. 화원도요지의 이동이지요. 산이면 도요지는 화원의 기술을 착실히 잇습니다. 잇는 것만 아니라 새로운 자기를 생산해 냅니다. 철화자기와 상감청자이지요. 산이면 진산세력은 화원에서 생산한 흑자기를 철화자기로 발전시킵니다. 또한 상감청자도 생산합니다. 흔히 상감청자하면 강진을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산이 가마터에서 상감청자 파편이 발굴되면서 산이면이 상감청자 발생지임을 알려줍니다. 다만 강진과 다른 점은 덜 매끄럽다는 것입니다.
산이면의 도기 기술은 강진으로 이동합니다. 산이면의 청자기술을 잇는 강진세력은 12세기 전후 상감청자 즉 고려청자 전성시대를 엽니다.
화원도요지는 처녀지입니다. 아직까지 발굴되지 않았기에 한국 초기청자 역사를 정립할 중요한 도요지입니다. 특히 훼손되기 쉬운 논밭이 아닌 산 속에 가마터가 존재하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물론 신덕저수지 확장공사로 8기 가마터는 물속에 잠겨있지만요. 한국 청자역사를 정립하는데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는 화원가마터의 발굴을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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