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불망비는 지방관리의 선정을 오래토록 기리기 위해 세워진 송덕(공덕)비를 이름한다. 지방관리의 선정 내용을 그 지방민 33인의 이름으로 조정에 알리거나 육조 사거리에 나아가 만인산(萬人傘)이라는 송덕 시위를 함으로써 조정에 그 뜻을 알렸던 미풍양속이었다.
그리고 또 조정과 지방간의 소통의 한 방법이었으며 백성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겸손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좌천의 성격이 짙은 지방관도 송덕비를 받게 되면 내직으로 불러 중책을 맡기기도 했다. 이렇듯 특혜와 명예가 함께 주어지는 송덕비는 고을원님들의 고을살이 마지막 고망으로 폭정의 방패 역할도 했다하니 우리 조상들의 현명함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송덕비를 세우려면 33인의 고을 백성들의 대표가 필요했고 차출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33이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중요한 일을 추진할 때에는 꼭 33인을 대표로 내세웠다. 만인산 시위는 물론 성균관 유생들이 조정에 상소를 올리거나 대궐 앞에 나가 농성시위를 할 때에도 33인을 보내 유생 전체의 뜻임을 과시했었고 폭정에 시달리다 못해 일으킨 동학혁명 때도 33인의 이름으로 사발통문을 했었다.
또 올해로 91주년을 맞은 기미년 3·1독립 만세 운동도 처음에는 3월 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33인의 민족대표를 세웠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3월 1일로 변경했다는 설이 있으니 우리 민족의 33에 대한 특별했던 감정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영세불망비도 그 지방 백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세워졌으며, 대개는 지방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서였지만 일반백성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지기도 했으니 그 대표적 인물이 제주여인 김만덕이었다.
김만덕은 약 200여년 전 조선 정조대의 여인으로 제주도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전 재산을 내어 아사 직전의 도민들을 구휼하여 제주 백성은 물론 조정에서까지 칭송을 들었다. 그 선행을 갸륵하게 여긴 정조는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입조케 해 친히 원하는 바를 물었고 제주 백성들은 그녀의 은혜에 보답코자 송덕비를 세우고 지금까지 헌향하고 있다하니 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여인중의 여인이라 할 것이다.
큰 재산을 모은다는 것은 타인의 피땀과 사회의 그 어떤 흐름을 이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많은 욕과 원망을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만덕은 재산을 모을 때 지독하다는 평판을 들으며 악착같이 재물을 모았다 한다.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지독하게 모은 전 재산을 어려운 이웃을 구휼하는 데에 썼다는 점은 또 다른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며, 그것은 칭송 받아도 충분하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에게는 혹독하게 내핍과 절제를 강조하면서도 이웃의 어려움에는 아낌없었던 제주여인 김만덕, 그녀는 지금의 사회에서도 통할 수 있는 여사업가였으며 여장부였다.
영세 불망비는 우리 선조들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이었고 서로 주고받는 상생의 풍속이었다. 이익을 보았다면 환원할 줄 알고 누렸으면 어루만져줄 줄 알고 받았으면 그 은혜에 보답할 줄 아는 사회의 구조는 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흐름이라 할 것이다. 우리 해남에서도 얼마 전 어느 할머니께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많은 쌀을 내 놓았다고 들었다.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그런 분들이 우리 해남을 빛낸 사람들이며 그런 분들의 선행은 1회성이 아닌 장기적으로 해남 군민광장 전광판에 그 이름과 얼굴이 보였으면 어떨까 한다. 그것이 작게는 송덕비가 될 것이며 그런 흐름이 곧 상생의 길이며 인심 좋은, 살기 좋은 해남을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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