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에는 조선시대 추앙을 받았던 두 선사가 있다. 서산과 초의. 조선시대 불교 배척 속에서도 석학들의 추앙을 받았던 인물들이다.
서산은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일으키며 몸소 전쟁에 나섰던 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약한 승군 대부분은 서산 문중이었다. 이들 승군들은 무기와 군량을 자체 조달했고 서산의 제자인 사명당은 전쟁 후 외교사절로 일본에 가 3000여명의 조선인 포로들을 귀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불교를 탄압했던 권문세족들은 피난을 떠났지만 서산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73세의 나이에 전쟁터를 찾았던 서산의 구국정신에 답례하기 위해 선조임금은  승려들로 하여금 제향을 받들도록 하는 사액축문을 내린다. 또한 금란가사와 발우, 숟가락, 염주, 당혜 등을 하사한다.
정조대왕에 이르러서는 서산대사 제를 국가 차원에서 거행한다. 정조는 서산을 기리기 위해 대흥사에 표충사를 짓고 예조정랑과 각 고을 군수와 현감으로 하여금 제향을 거행케 한다.  제의 순서와 음식 진설 등도 직접 써 보낼 정도로 정조는 서산대사의 구국정신을 높이 산 임금이다.
서산대사가 호국불교 사상을 실천했던 스님이라면 초의는 대흥사 일지암에서 조선의 차를 부흥시킨 스님이다. 최초로 우리나라 차와 다도를 서술한 동다송을 일지암서 집필했고 숱한 석학들과 만나면서 차의 가치를 일깨웠다. 초의는 차의 진정한 의미도 설파했다.
초의선사가 일지암에 머물고 있을 때 대흥사는 유교와 불교가 대립 없이, 서로를 이해하며 만나는 장이었다. 초의는 유학자인 다산 정약용을 추앙했던 인물이다. 다산의 학문을 높이 샀고 그에게서 배움을 얻고자 했다. 추사와는 평생지기였고 당대 유명한 석학들이었던 홍현주·석주형제, 윤정현 등과도 교류했다.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유도 추사의 제자다. 당시 대흥사는 유학과 불교사상이 활발히 논의되는 장소였고 시서화를 즐기는 예술의 전당이었다. 당시에도 일지암은 차의 성지, 초의는 다성으로 추앙받았다.
이순신이 백의종군과 숱한 고초 속에서도 나라를 지켰듯 마찬가지로 서산도 불교의 탄압 속에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선이다. 일제 강점기 때 사라져 버린 서산대사 국가 제향을 복원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시대 때 서산대사로 인해 대흥사가 충의 사찰로 추앙받았듯 지금에 이르러서도 대흥사를 충의 사찰, 호국이념이 깃든 사찰로 세울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서산을 대흥사 표충사에 있는 영정으로만 인식해 왔는지 모른다. 서산대사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야 한다. 그 몫은 대흥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산대사는 불교라는 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틀 안에 있어야 할 인물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국가 제향복원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초의선사가 집필한 동다송은 현대에 이르러 학술적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이와 함께 일지암이 가지고 있는 조선시대 학문과 예술의 전당이었다는 가치도 함께 복원할 필요성이 있다.
초의의 다 사상도 대흥사를 지천에 두고 있는 우리들부터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초의가 주창한 차는 귀족적이고 형식적인 다도가 아니었다. 초의가 차 끊이는 방법을 중요시 했던 것은 차 맛을 내기위함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자연의 이치를 깨달기 위해서였다.  
대흥사는 호국의 상징이요, 차의 성지이다. 그것을 살리는 것은 두 선인에 대한 가치를 먼저 아는 것이며 선사를 기리는 제도 대흥사나 다인회가 아닌 국가나 지자체가 맡아야 한다.
대흥사의 권위와 가치를 살리는 것은 종교를 넘어 우리지역에 하나의 상징을 두는 것이며 그 상징을 통해 해남의 가치도 빛을 보게 된다.
대흥사는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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