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그를 낳자 남편 따라 죽음 택해
고산 영향으로 자연에 묻혀 『지암일기』 남겨



우리나라는 남녀평등이 많이 이뤄졌다고 하지만 가부장적 사회질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나라가 여필종부를 사회윤리의 절대 가치로 내세운 것은 조선후기 들어서다.  
17세기를 넘어서야 가부장적인 장자를 중시하는 종법질서가 이뤄진 것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따져도 그리 멀지 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가부장적 사회질서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나 관습으로 생각되지만 그리 먼 시기의 일도 아닌 것이다.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만드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성리학적 윤리관이라 할 수 있다. 충과 효를 지배질서의 이념으로 내세웠던 조선은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여인들에게는 남자에 대한 복종을 강요했다.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여인들의 권리와 사고는 남자와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재산을 나누는 것에 있어서도 남녀 똑같이 나누는 남녀균분의 사회였고, 제사를 모시는 것에 있어서도 남녀가 똑같이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봉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16세기 사림정치가 시작되고 조선후기로 넘어가면서 종법질서가 강요되자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깊은 안방에서 지조를 절대가치로 강요받으며 살아야 했다.
또한 열녀를 배출한 집안은 문중(집안)의 자랑으로 여겨졌으며 『삼강록』에 오르고 열녀비를 세우며 이들의 죽음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절식으로 지조 지킨 윤이후의 어머니

양반사대부가로 성리학을 실천하며 살았던 해남윤씨도 이러한 사회질서 속에 살아야 했는데 이같은 사회이념 속에 희생당한 여인이 고산 윤선도의 둘째 아들 윤의미(尹義美)의 부인 동래정씨다.
고산 윤선도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인 의미는 고산의 나이 50세 때, 스물네 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당시는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여필종부의 윤리가 요구되는 사회였다. 사대부가의 위세를 떨치고 있었던 해남윤씨 집안이었던 만큼 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의미의 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기위해 절식(絶食)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의미의 부인은 뱃속에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아마 이쯤에서는 당시 누구라도 절식을 만류했을 것이다. 고산 또한 이같은 상황에서 며느리의 절식을 만류하고 아이를 낳도록 한다. 이에 따라 의미의 부인은 아이를 낳게 되지만 아이를 낳은 후 며칠 되지 않아 다시 절식을 하여 남편의 뒤를 따르게 된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당시는 사대부가의 며느리가 남편을 따라 목숨을 바쳐 지조를 지킨다는 것은 집안의 자랑이었다. 아마 해남윤씨 집안에서도 고산이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이때가 성리학적 종법질서가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동래정씨의 죽음은 어떤 지배이념이 사회를 차지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러한 질서에 따라가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당시 임진왜란으로 인해 온 강산이 황폐화되고 조선의 여인들이 능욕을 당하는 혼란한 현실 속에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지배층에서 강요하였던 성리학적 사회윤리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여인들에게 있어서는 가혹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후기 열녀들의 지조와 절개를 기록한 『삼강록』이 발간되어 배포되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이때 태어난 윤이후(尹爾厚, 1636~1699)는 천재적인 화가였던 공재 윤두서의 친아버지다. 윤이후의 출생은 당시의 비극적인 사회상황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를 친아버지로 둔 공재 윤두서는 나중에 큰집으로 양자를 가 종손으로서 가업을 잇게 되는데 이때 공재를 양자로 택한 것은 고산이었다.

고산의 문학성 이어받은 윤이후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잃고 세상에 나온 윤이후는 조부인 고산 밑에서 자랐다. 그래서 윤이후에게 고산은 차라리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조부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윤이후는 관계로 진출해 관료생활을 하는 것보다 초야에 묻혀 글을 쓰면서 살아가는 문학적 삶을 살게 된다. 이같은 배경 속에서 윤이후는 『지암일기』를 남기게 되는데 『지암일기』에 나오는 ‘일민가’는 윤이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고산의 문학적 성향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해남윤씨가에서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 하면 문학과 회화부분에서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윤이후는 이들 가운데 묻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암일기』는 윤이후가 관직 생활을 내놓고 향리에 내려온 후 화산면 죽도에 머물며 57세(1692)부터 69세(1699)까지 7년 9개월가량의 기록을 3권에 담고 있다. 『지암일기』 중에는 일민가(逸民歌)라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일민가는 관계를 떠나 강호에 묻혀 사는 초야일민(草野逸民)의 심회를 읊고 있다. 때문에 가사에는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작자의 모습과 정회가 잘 나타나 있다.


저즌옷 버서노코 황관黃冠을 ㄱ.라쓰고
채ㅎ.나 떨텨쥐고 호연浩然히 도라오니
산천이 의구ㅎ.고 송죽이 반기는


일민가에 나오는 제 3단은 윤이후가 향리인 해남으로 돌아와 즐거움을 누리며 소요하는 전원생활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고산의 ‘산중신곡’에 나오는 부분과 견줄 수 있을 만큼 한가로운 듯 자연 속에 소요하는 자신의 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일민가를 보면 자연 속에 몰입해 은둔하는 모습이 잘 노출되어 있어 관계를 떠나 은일생활을 하던 윤이후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지암일기』에 나오는 ‘일민가’는 국문학사에서 그리 크게 부각되어 있지 않은 작품이지만 윤이후의 삶이 문학적 흔적으로 남아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고산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고 자란 손자인 이후를 안쓰럽게 생각하고 특별히 사랑하였다.
윤이후의 작품에 고산의 문학적 경향이 잘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할아버지와의 끈끈한 인연 때문인지 이후는 1674년(현종 15) 고산이 죽고난지 몇 년 후 조부인 고산이 경자년에 올린 상소 및 예설 두 편을 다시 조정에 올린다.
글 정윤섭(고산 윤선도유물전시관)



**아래 사진 설명

윤이후의『지암일기』에 들어 있는 작품 일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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