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연재 > 난중일기를 통해서 본 이순신과 해남
명량해전, 이순신에겐 가장 체계없고 어수선한 전투였다
박영자 기자  |  hpakh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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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29  11: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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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지 어란 진영에 주둔한 왜수군 중 명량해전에 선발대로 참가한 부대는 구루지마와 도도가 이끄는 133척의 함대였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난중일기를 통해서 본 이순신과 해남 - ⑥명량해전-2

판옥선의 뛰어난 함포 때문에 왜수군 새벽에 명량 기습
장수들 겁에 질려 후방으로 후퇴, 이순신 홀로 고군분투

명량해전은 1597년 음력 9월16일 일어난 전투이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후 43일 만에 명량해전을 맞는다. 그것도 13척의 배로 치러야 할 해전이었다. 
이순신이 최후의 방어선으로 지목했던 명량해역은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 7월 수군의 본영을 한산도로 옮겨갈 때 명량으로 이전하자는 안이 거론된바 있다.
영암출신 김극희는 한산도는 지형이 넓어 적에게 쉽게 드러나지만 명량은 적이 통과하지 못할 길목인데다 바다의 형세가 우회(迂廻)해 지척에서도 분별하기 어려운 곳이라며 본영을 명량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순신도 13척의 배로 대규모 일본전선을 맞아 싸워야 할 곳은 명량뿐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인지한 상태였다.
명량 즉 울돌목은 병법에서 보면 사지(死地)이다. 이순신이 주둔하고 있었던 진도 벽파진은 사지인 울돌목을 뒤에 두고 있다. 따라서 이순신은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9월15일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다.

 

왜수군, 함포 때문에 백병전 노려

이때 왜수군은 송지 어란에 집결한 상태였다. 송지 어란에서 우수영까지는 대략 30km, 뱃길로 3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9월16일 이른 아침인 6시30분 경 적선이 이순신 본대가 있는 우수영을 기습한다. 임진왜란 기간 왜수군은 주로 기습전을 노렸고 기습시간은 밤과 새벽이었다. 이유는 조선수군의 장거리 포 때문이었다. 왜수군은 조선수군의 발달된 함포 때문에 낮 전쟁은 피했다. 대신 칼싸움에 능한 왜적은 기습전으로 배 위의 백병전을 주로 노렸다. 실제 왜적은 칠천량해전에서도 새벽에 기습을 했고 송지 어란진에선 새벽 6시에 총 56척 중 8척으로 기습을 한다. 또 벽파진에선 밤늦게 기습을 해왔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왜수군은 이순신의 전술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이순신은 주로 전면전보단 유리한 지형을 확보한 후 적을 유인해 우수한 함포로 공격해 승리했다. 
어란과 벽파진에서 소규모 기습전을 벌였던 왜수군은 이제 대규모적인 전투를 준비하게 된다.
일본은 육군과 수륙양면 작전으로 전라도 공략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결정적인 해전으로 명량을 겨냥했고 따라서 130여척으로 우수영을 기습한 것이다. 
물론 명량해전은 적과 아군 모두 상대방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왜적은 3번에 걸친 어란과 벽파진의 기습을 통해 조선수군의 전세를 파악한 상태였다. 이순신도 탐방꾼들을 통해 왜수군의 진로와 전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기습, 명량해전은 이순신이 치렀던 그 어떤 해전보다 어수선했고 체계적이지 못했다. 또한 목을 베고 싶을 만큼 이순신이 장수들에게 가장 분개한 전투였고 장수들은 이순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왜적의 기습으로 초반의 전투는 이순신 혼자 버텨내야 했다. 명량해전 당일 쓴 일기에는 이날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이른 아침 망을 보던 자가 와서 보고하기를 “수도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으로부터 곧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옵니다” 하였다. 곧 모든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0여척이 우리 배들을 둘러쌌다. 적선이 우리 배를 에워싸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도망하려는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는 800m 정도 나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순신, 홀로 고군분투하다

우수영 앞바다에서 기습을 당한 이순신은 홀로 고군분투한다. 겁을 먹은 장수들의 배는 본진에서 400~800m까지 이탈한 상태였지만 적에게 에워싸인 이순신으로서는 장수들의 배를 불러올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기습과 동시에 고군분투했던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노를 빨리 젓게 해 앞으로 나아가며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쏘았다. 군관들도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댔다. 그러자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했지만 여러 겹으로 배가 둘러싸여 있어 배 위의 모든 사람들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때도 이순신은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 적을 쏘아 맞혀라’고 명한다. 이순신이 고군분투하며 외롭게 싸우고 있을 때도 여러 장수들의 배는 400미터 이상 물러나 있었고 김억추의 배는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장선을 지켜야 할 중군장인 김응함의 배도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은 이때의 상황을 ‘배를 돌려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다가 내걸고 싶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장수들의 배는 더 멀리 물러날 것이고 적들은 더 덤벼들 것 같아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하는 형편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고군분투하던 이순신은 군령으로 초요기를 올리게 한다.  

   
▲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기습을 당했다. 임진왜란 기간 왜수군은 조선수군의 발달된 함포 때문에 낮 전쟁은 피했고 대신 칼싸움에 능했기에 기습전으로 배 위의 백병전을 주로 노렸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안위야, 도망간들 어디서 살 것이냐

초요기를 올리자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와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본진으로 온다. 이순신은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고 호통을 친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고 명한다. 이에 김응함과 안위의 배가 적진으로 뛰어든다.
김응함과 안위의 배가 뛰어들자 적장 구루지마는 휘하의 배 두 척에게 안위의 배를 공격하게 한다. 구루지마의 명령을 받은 왜수군은 개미 붙듯 안위의 배 위로 뛰어든다. 그들의 장기인 배 위의 백병전을 노린 것이다. 안위의 휘하 군사들은 몽둥이와 긴 창, 돌멩이를 가지고 배에 달라붙은 적들을 후려치지만 수없이 달려오는 왜적으로 군사들은 기진맥진한다. 이때 이순신이 뱃머리를 돌려 총통을 쏘아댔고 이에 구루지마가 탄 배와 휘하의 배 2척이 거의 뒤집혀진다. 여기에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합세해 안위를 둘러싼 세 척의 왜선을 완전 파괴시켜 버린다. 이순신은 일기에 ‘3척의 배에 탔던 적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 이순신의 배에는 안골포에서 항복해온 왜인 준사가 있었다. 준사는 바다에 빠져 있는 적을 굽어보다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적장 구루지마라고 말한다. 이순신은 급히 물 긷는 김돌손을 시켜 구루지마를 갈구리로 낚아 올리게 하고 시신을 토막 내 목을 장대에 내건다. 대장이 죽은 것을 본 적은 기세가 크게 꺾였고 이에 조선수군 배들은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지자, 현자포,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댔다. 이에 적선 31척이 일시에 무너지고 만다.

   
▲ 명량해전에서 왜수군은 구루지마를 선두에 세운다. 구루지마는 시코쿠(四國)의 미야쿠보 출신으로 시코쿠는 울돌목과 같이 물살이 빠른 협수로였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왜수장 구루지마, 선두에 서다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14일, 송지 어란에 머물렀던 왜수군 장수는 도도 다카토라와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지휘하는 330척이었다.
도도 다카도라는 일본의 다이묘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임진왜란에 참여했다. 그는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에게 첫 승리를 안겨준 일본군 첫 패장이었다. 그러나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섬멸시키며 복수에 성공한다.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한산도대첩의 패장이다. ‘가장 미운 이도 이순신, 가장 좋아하는 이도 이순신, 가장 죽이고 싶은 이 역시 이순신이고, 가장 차를 함께하고 싶은 이 역시 이순신’이라는 말을 남긴 이로 유명하다. 
가토 요시아키는 임진왜란에 수군 제3진을 이끌고 참가한다. 그도 다른 장수들과 마찬가지로 안골포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대패해 휘하의 전선 40여척을 잃었다. 그러나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괴멸시키는데 공을 세운다.
구키 요시타카는 일본 구마노의 해적출신이다. 임진왜란 때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순신에게 패한 왜수군을 구원하러 오지만 안골포해전에서 참패한다.
마지막으로 명량해전에서 죽음을 당한 구루지마는 일본 시코쿠 지방의 다이묘이다.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25세 때 형과 함께 임진왜란에 참여하지만 형인 구루지마 미치유키는 당포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먼저 죽임을 당한다. 난중일기에는 형인 미치유키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당포해전을 기록한 1592년 6월20일 일기에 ‘당포 앞 선창에 이르니 적선 20여척이 줄을 서서 정박해 있었다. 적의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판옥선만 하였다. 배 위 누각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됨직 했다. 그 누각 위에는 왜장이 우뚝 앉아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승자총통과 화살 등을 비가 퍼붓듯 마구 쏘아 대었더니 왜장이 화살에 맞아 굴러 떨어졌다. 순간 모든 왜적들이 놀라 한꺼번에 흩어졌다고 적고 있다. 이때 죽은 왜장수가 미치유키가 아니었을까.
이렇듯 어란진에 주둔한 일본수군 장수들은 모두 이순신에게 패한 경험이 있었고 설욕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송지 어란에 주둔한 왜수군 중 명량해전에 선발대로 참가한 부대는 구루지마와 도도가 이끄는 133척의 함대였다. 특히 구루지마는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명량해전에 참여한 이다. 구루지마가 이끈 수군은 일본 수군의 탄생지라 할 수 있는 일본 시코쿠(四國) 미야쿠보 지역의 해적출신들이다. 시코쿠의 미야쿠보 지역은 엄청난 조류와 물의 속도가 울돌목과 비슷한 곳이다. 당연히 구루지마와 그의 수군들은 울돌목과 같은 빠른 물살에 익숙해 있었고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울돌목은 위험한 곳이 아니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듯 이순신이 울돌목의 빠른 물살을 이용했다고 하지만 왜수군도 울돌목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구루지마 목을 장대에 걸다

왜수군은 해전에 강한 구루지마를 선두에 세운다. 그런데 대장인 구루지마가 죽은 것이다. 왜수군의 진열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류는 일본 측에 불리한 썰물로 바뀌었다. 조류를 이용하는 것은 해전에서 기본, 이순신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일제히 북을 울리고 장거리 포를 발사하며 적들을 울돌목의 사지로 밀어 넣었다. 사지를 뒤에 두고 싸움을 걸었던 왜수군은 좁은 해협에서 도망가는 전선과 올라오는 전선들이 서로 엉켜 자중지란을 일으켰다. 왜선 31척 완파, 90여척은 치명적 파손, 온전한 배는 10여척에 불과했다. 완전한 승리였다. 일본은 대패했다. 이순신은 하늘이 도운 승리였다고 했다. 그만큼 명량해전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전쟁이었다. 그러다보니 명량대첩과 관련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물살의 도움으로 승리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명량해전에서 일본은 이순신의 필사즉생(必死則生)의 정신에 진 것이며 이순신의 사지를 이용한 병법에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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