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적 자각운동에서 일어난 동국진체는 근대 이르러 남도의 글씨체로 자리잡는다.(사진 왼쪽부터 의재 허백련(우수영 약무호남시무국가), 장전 하남호(바닷가 땅끝탑, 땅끝항 앞 땅끝비), 오재 박남준(땅끝전망대 땅끝비), 백련 윤재혁(아침재 정상 비).
민족적 자각운동에서 일어난 동국진체는 근대 이르러 남도의 글씨체로 자리잡는다.(사진 왼쪽부터 의재 허백련(우수영 약무호남시무국가), 장전 하남호(바닷가 땅끝탑, 땅끝항 앞 땅끝비), 오재 박남준(땅끝전망대 땅끝비), 백련 윤재혁(아침재 정상 비).

 

 광활한 농토, 넓은 바다를 낀 남도의 정서는 틀보단 개성, 자유분방함이다.
민족적 자각운동에서 일어난 자유분방한 동국진체, 땅끝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서체는 동국진체다. 공재 윤두서로부터 시작된 남도의 동국진체는 자각의 사상과 예술이 융합돼 개성있는 남도의 핵심 예술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동국진체, 공재로부터 시작 

조선후기 민족적 자각운동에서 일어난 동국진체는 자유분방한 필치에 해학과 여유를 형상화한 것이 특징이다. 틀에 묶인 서법이 아닌 작가 고유의 독창성을 추구한 글씨체이기에 남도 작가들은 자신의 창작을 더해 동국진체를 다양한 서체로 확대시켰다. 
개성이 듬뿍 담긴 동국진체는 옥동 이서(1662~1723)와 공재 윤두서(1668~1715)에서 시작돼 원교 이광사(1705~1777)에 이르러 완성됐다. 원교 이광사는 틀에 갇힌 주자학이 아닌 작가의 독창성을 인정하는 학문인 양명학을 따랐다. 따라서 그는 이서와 공재로부터 시작된 동국진체를 자신만의 서체로 완성해 나갔다.
원교 사망 이후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의 활동시기가 왔다. 추사는 실학과 양명학에 기반을 둔 자유분방한 동국진체가 맘에 들지 않았다. 주자학적인 반듯함과 격조를 중시한 추사체를 개발해 당대를 풍미시킨다. 
추사체가 유행함에 따라 동국진체가 설 땅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자각적 예술운동은 전북 출신 창암 이삼만(1770~1847)에 의해 다시 일어섰다. 평생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를 필본으로 삼았던 창암 이삼만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그 어떤 틀에도 구애받지 않는 독창적인 유수체, 창암체를 개발했다. 그리고 호남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그의 제자들에 의해 동국진체는 더욱 대중화됐고 특히 일제강점기 진도 출신 허백련과 손재형에 의해 계승되면서 동국진체는 남도서예로 굳건히 자리잡게 된다. 의재 허백련의 자유롭고 유려한 서체는 우수영 명량대첩지에서 만날 수 있다.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가 그의 글씨체다.   

허백련‧하남호‧박남준 계승

18세기는 동국진체, 19세기는 추사체가 유행했다면 20세기는 소전 손재형의 소전체가 자리했다. 
진도 출신 손재형(1902~1981)은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에 근거해 한글 예서체의 새로운 서체를 완성, 동국진체를 발전계승 시켰다. 그로인해 1970년대 한글서예의 기틀이 마련됐는데 가장 대표적인 소전체가 과거 교과서 표지의 ‘국어, 영어, 수학’ 등의 글씨체이다. 
소전 손재형의 소전체를 계승한 이가 진도출신 장전 하남호다. 장전도 스승의 전서체‧예서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서예세계를 개척했다. 진도읍에는 그가 개관한 남진미술관이 있다. 장전은 예서체로 국전 연 4회 특선한 인물로 전서와 예서체에 뛰어났다. 그는 한번도 개인전을 연 바 없지만 그의 작품은 전국에 걸쳐 있고 땅끝마을 비석과 땅끝탑의 글씨가 그의 서체이다. 
해남출신 서예 대가 오재 박남준도 있다. 전라남도에서 가장 한글서예를 잘 쓰는 인물로 알려졌던 그의 글씨체도 창암 이삼만의 제자들이 남도에 뿌리내린 동국진체가 바탕이다. 남도에서 동국진체는 1960년대에는 김용구를 필두로, 1970년대는 오재 박남준 등을 통해 전통이 이어졌다.
광주에서 활동했던 오재 박남준의 필체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그는 광주교도소 교정협의회장을 역임하며 반평생을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서예를 가르치며 나눔과 봉사의 삶을 살았다. 오재는 미협광주지부 서예분과위원장,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중국 문화대 화강박물관 초대전을 갖는 등 서예가로 인정받았다. 
황산면 출신인 오재의 서체는 땅끝전망대에 서 있는 땅끝비와 우수영명량대첩 조각공원 휘호, 옥천 만의총 등에 남아 있다. 

동국진체 바탕에서 백련체 탄생

해남 길가 비석과 건물 등에 가장 많이 걸린 글씨체가 백련 윤재혁의 백련체이다. 
백련은 옥동 이서와 함께 동국진체를 창시한 공재 윤두서의 8대손이다. 원교 이광사가 중국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우리민족 고유의 동국진체를 완성했듯 백련도 왕희지의 고전체를 철저히 탐구하며 왕희지의 서체와 동국진체 바탕 위에 자신만의 독특한 백련체를 개발해 해남에 백련체 바람을 일으켰다. 행서체와 초서체에 뛰어난 그의 작품들은 획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먹의 흐름이 맑아 백련 서체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는 고전체를 바탕으로 창시한 백련체에 이어 ‘슈퍼 스트링 아트’라는 새로운 영역의 현대서예도 탄생시켰다. 백련은 동양예술의 정수인 서예와 서양의 양자학의 개념을 결합시킨 ‘신개념 양자역학적 서예’를 창시한 것이다. 
백련 윤재혁 선생의 글씨체는 해남문화원을 비롯해 향교, 단군전, 우수영관광지, 북평주민자치위원회, 아침재 비석, 만의총 큰 비석 등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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