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것이 얄궂기도 하여라. 떠나간 언니를 그리워하며 내가 이런 편지를 쓸 줄이야. “언니!”하고 불러놓고 나는 목 놓아 우네. “태정언니!” 거푸 불러도 대답은 없고, 먹먹한 가슴에 그리움만 밀려오네.
“관순씨!” 하고 평소처럼 한 번만 불러주지. 100미터 저 밖에 서 있어도 좋으니 그냥 한 번 웃어나 주지. 그도 싫으면 멀리 걸어가는 언니 뒷모습이라도 한 번 보게 해주지. 따뜻한 온기 감도는 손 잡아보고픈 건 과한 욕심인가! 어쩜 이 세상에 있던 언니 흔적마저 온전히 거두어 갈 수가 있어? 내가 이렇게 언니 보고 싶어 하는데 한번쯤 꿈속에라도 찾아와 주면 안 돼?
김태정. 검박한 살림 꾸리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시인. 해남에 터 잡고 산 7년을 가장 행복했다 말한 여인. 1년 남짓 암을 안고 투병하다 49년 짧은 삶을 마감한 나의 언니.
응급실에 누워있는 언니를 안고 좋아한다고 고백 했지. 2주밖에 못산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내가 왜 언니를 좋아했을까? 언니는 ‘못난 것들은 지들끼리 얼굴만 봐도 좋다.’는 시 구절을 빌려 설명하곤 했지. 그래 맞아. 언니가 못나서 좋았어. 구멍 난 양말에 낡은 털신 신은 모습이 좋았어. 화장기 없는 맨 얼굴도 좋았고, 순한 기운만 가득한 눈동자를 쳐다보는 것도 마냥 좋았어.
타자기나 다름없는 노트북을 매만지며 ‘글 쓰는데 이거면 충분해.’하던 소박함도 좋았고. 이 빠진 잔에 타 온 커피를 ‘이가 빠졌네.’하며 내밀던 언니 말투도 좋았어.
내가 미황사 사무장이었을 때 괘불재 행사로 퇴근을 못하고 절에서 자야할 때가 있었지. 밤 12시가 넘은 시간 연락도 없이 언니 집에 쳐들어갔잖아. 흔쾌히 웃는 낯으로 맞아준 언니.
새벽에 일어나 절에 가려고 주섬주섬 챙기니 언니가 콩물 한 잔을 내밀었지. 곤한 잠 자야할 시간에 일어나 나를 위해 만들어준 콩물 한잔. 근데 충분히 불리지 않은데다 믹서에 제대로 갈리지도 않았어. 제대로 삶아지지 않아 비린내는 또 얼마나 심하던지. 내가 마신 건 콩물이 아니라 언니의 정성이었어. 온전히 나를 염려하며 만들어준 귀한 거였잖아. 언니 하면 지금도 그때 콩물이 생각나.
언니를 만나면 늘 시간이 모자랐어. 말수 적은 우리 두 사람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다고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 나누다보면 몇 시간 쯤 화살을 타고 날아갔지. 언니처럼 죽이 잘 맞는 이야기 상대를 내가 또 만날 수 있을까 싶다.
미황사 아름드리 동백나무 아래 잠든 언니. 살아서 사무치게 좋아했던 곳에 안식을 얻었네 그려. 앞으로 내 앞에 피는 동백꽃은 예사로운 꽃은 아니겠지.
언니와 내가 이번 생에 만난 건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고 말한 적 있지? 한 물이 다른 물을 만나 함께 흘러가듯 언니와 만남도, 이후의 인연도 자연스러웠던 걸 보면 필시 운명이었던 것 같아. 단박에 알아보고 ‘절친’이 되었던 이번 생처럼 그렇게 또 언니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어. 그때도 멋진 여자 친구로 만나자 약속했지? 언니가 동생하고, 내가 언니하기로 했던가? 함께 여행가기로 한 마지막 약속 못 지켰으니 그땐 바람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니자. 그때까지 안녕. 내가 가장 사랑했던 태정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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