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사를 쓸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쓸 것인가가 고민이다. 지역신문, 주민들과 밀착도가 높은 지역신문의 기사는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8만의 공동체인 해남, 어찌보면 8만 군민 모두 소중한 존재이자 해남을 이끄는 주역들일 것이다.
펜이 무뎌졌다. 날을 세운 기사를 보고 싶다. 간간히 만나는 독자들의 반응이다. 펜이 무뎌졌고 날카로운 비판기사가 없다는 지적은 아픔이다. 그러나 오보를 냈을 때, 또는 나의 기사가 그 누군가를 아프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보단 아픔이 덜하다.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분노가 가득한 글은 독자의 마음을 분노케 하고 따뜻한 기사는 읽은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정론직필, 언론에 근무하는 한 버릴 수 없는 명제이다. 그러나 정론직필의 근본적인 명제는 사람을 살리는 펜을 일컬을 것이다. 언론이 사회의 공기라고 한다. 공기,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고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즉 공기라는 의미에도 사람을 살리는 역할이 중요함을 암시한다. 그래서 어떤 기사를 쓸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쓸 것인가가 가장 큰 과제로 떠오른다. 해남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기사, 해남의 발전에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는 기사를 쓰고 싶다는 욕구가 크다.
10월에 열린 해남군의회 임시회에서 가장 도마위에 올랐던 내용은 환경미화원들의 상여금 지급 문제였다.
해남군의회 의원들은 그동안 지급되지 않았던 상여금을 군의회의 사전 승인없이 해남군이 집행했다고 반발했고 이에 집행부는 임금에 관한 것은 예외의 규정으로 해석했다고 맞섰다. 이와 관련된 기사를 보도했다. 그런데 해남군이 집행한 예산은 2000만원이었는데 5억원이 넘은 예산으로 보도했다. 오보였다. 또한 군의회의 의견만 반영했을 뿐 담당자의 의견은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신문에서 오보는 발생한다. 오보뿐 아니라 일방적 보도를 한다. 당연히 반발하는 이도 아픔을 겪는 이들도 생기기 마련이다. 글이란 쓰는 이와 읽은 이들은 무심히 지나칠 수 있다. 그러나 관련자들이 느끼는 체감은 전혀 다르다. 이후 신문에 오보를 냈음을, 일방적 주장만 실었음을 알았을 때 담당자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솔직히 오보를 냈고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채 썼음을 시인했다. 그때야 상대방은 겪었던 마음의 무게를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해남에서 복지관련 일에 종사하는 이가 있다. 지금은 복지관련 분야에 예산도 지원되고 하지만 15여년 전에는 그렇질 못했다. 열심히 복지관련 일을 하던 그는 지쳐갔다. 그러면서도 해남 어르신들을 위한 잔치마당을 마련했다. 지금은 노인 동아리도 많지만 그때 처음으로 면단위 노인들이 다양한 놀이를 준비해와 즐긴 잔치였다. 신문에 대서특필했다. 10년이 지난 후 그를 다시 만났다. 그 기사 때문에 힘을 얻고 다시 일을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며, 감사의 말을 전해왔다. 그의 말은 지역신문이 어떻게 글을 써야하는지, 글이 사람을 살릴 수 있음을, 그 후론 사람을 살리는 글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비판적인 글도 실어야 한다. 그러나 비판의 무게는 그것을 고치는데 목적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한 갈등은 항상 존재한다. 갈등이 사법권으로 언론보도로 이어졌을 때 갈등 조정은 끝이 난다. 지역신문의 역할은 공동체를 강화하는데 있다. 분권의 힘은 우리 스스로 해남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지역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평가와 비판 이전에 함께하고 싶은게 해남우리신문의 소망이다. 해남공동체를 향한 언론의 역할, 지금도 실험 중이다. 해남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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