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헤아리고 분류할 수 있을까. 자의적으로 정한다면야 못할 것도 없지만, 남들을 이해시킬 정도까지라면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그만큼 사랑은 흔하기도 하거니와 또한 만족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어떤가. 역시 흔하고 만족하지 못하는가. 사실 이 물음 자체부터 금기다. 이 사랑은 하늘에서 내린 계명과 같은 것이어서 빈틈투성이인 세태의 사랑과는 차원에서부터 다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빈틈이 없어야 바람직하다.
근년 들어 대중문화는 가족 서사를 즐겨 다루고 있다. 예컨대 각종 매체로 전이 분화되고 있는 <친정엄마>, <마요네즈>, <엄마 미안해>,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등이 기억에 남는다. 이처럼 즐겨 다룬다는 점은 대중문화가 감각적으로 자주 흔들어 본다는 이야기다. 대중문화는 흔들면 흔드는 대로 속절없이 틈을 죄다 보이는 대상을 더 이상 매력적으로 보지 않는다. 빈틈없는 대상일수록 흔들어 볼 수 있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정말 세상에 빈틈없는 대상도 있나, 라고 묻고 싶은 것이다.
사실 부모 자식 간에 얽힌 갈등과 이 갈등을 푸는 대중문화는 자칫 생태적인 암묵과 함께 동질성을 곧장 확인하는 작업쯤으로 끝나버리곤 한다. 어느 가족 간에 겪었을 피눈물 나는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채 봉인되고 만 셈이다. 사실 빈틈이 없는 대상은 어떠한 경우라도 자율적인 구조와 의미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대상은 자체복원력이 강하다. 따라서 부모 자식 간에 사랑도 역시 빈틈을 쉽사리 보여주지 않는다. 대중문화는 집요하고도 심술궂게 수없이 흔든다. 그러다 보니 그토록 완강하게 버티던 대상도 어느 순간 설핏 틈을 보인다. 신기하게도 이 틈에서는 덮고 넘어 갈 수 없는 이야기가 웅성거린다. 급기야 이야기들은 스스로 이야기를 내뱉기 시작한다.
부모가 하는 이야기는 오로지 자식에서부터 시작하고 자식으로 끝난다. 그야말로 ‘눈 먼 사랑’이다. 대신 자식들이 하는 이야기 속에는 명예나 출세 혹은 문제회피를 위해서 어머니를 숨기거나, 아예 외면하기 일쑤다. 자식을 자식이라 더 이상 부르지 못하는 어머니!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도 않는 자식! 이건 끔찍한 세태다. 분명 공평하지 않는 사랑 모델이다. 그래도 부모는 눈은 감되, 넉넉한 가슴은 열어둔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이 사랑을 귀하게 기억하자. 기억했으면 실천해 보자.
5월, 가정의 달이다. 특별히 부모 자식 간의 사랑부터 진득하게 해 보자. 혹여 결손가정이 있다면 우리가 서로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어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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