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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영, 전라우수영 민속촌화가 미래다
조선시기 우수영에는 무려 455년 동안 서남해지역을 호령하던 수군사령부가 있었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조선 후기 우수영에 소속돼 근무하는 자는 사령관격인 우수사 외 5544명이고, 우수사의 관할에 편성된 전라우도 수군은 총 2만5000명 정도였다. 이와 관련한 역사와 문화가 풍부하지만 현재 우수영의 영내를 들여다보면 참담하다. 파출소를 제외한 관청은 모두 이전됐고, 즐비했던 상가는 거의 문을 닫았으며, 한때 10개 마을에 천 호를 넘나들었으나 흉가가 거반이다.
지금은 우리 군에서 가장 낙후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어려운 곳 중 하나로 몰락했다. 서남해안 최대의 포구도시로 기세등등했던 옛 영화가 전설이 된 것이다. 삼남 즉, 경상, 충청, 전라도에 설치된 수영 중에서 전라우수영만을 제외하고 모두 시로 발전해 더욱 안타깝다.
1440년 세종 당시 전라수영은 지금 목포시 용당동 당곶(唐串)에 있었다. 당곶은 목포상고 정문 인근이다. 영산강 입구에 있어 호남내륙을 방어하기에는 좋았으나 남해에 출몰하는 왜구 토벌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종은 이각(1374∼1446)을 보내 조사하게 한 후, 전라수영을 우수영으로 이설을 명했다.
세종은 우수영이 해로의 요충지였음을 특별히 주목했다. 이는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어록에 잘 나타난다. “한 명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을 두렵게 하는 곳이다(一夫當逕 足懼千夫).” 이순신은 일전에 우수영을 답사하고 우수영 우후(부사령관) 이정충과 태평정에서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다 잠든 적이 있었다. 이때 이순신도 우수영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태평정은 성(城)의 남쪽 돌출모서리에 있는 큰 정자로 남문밖에 있는 전선들과 관아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었다.
객사는 우수영에 있었던 30여 개소의 관아 건물 중 핵심건물이다. 객사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셨다.
우수영 객사는 ‘파도를 잠 재운다’는 뜻으로 복파관(伏波館)이라 칭했으며, 지금의 우수영교회와 초등학교 석조건물터에 걸쳐 있었는데, 우수사 김동흘(金東屹)이 중창했다.
면사무소에는 우수사의 집무실인 동헌과 그의 사택인 내아가 있었고, 초등학교에는 객사와 육방의 아전들이 근무하던 질청이 있었으며, 여러 창고는 남문통에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건물들은 근대기 이전에 영창(營倉)만 남기고 모두 소실됐다. 1894년 동학란 때 두 차례 우수영 전투 결과로 생각된다.
7월 동학군 수천 명이 우수영에 침입해 무기를 탈취했고, 12월에 또 침입했던 것이다. 동학란이 진압되고, 1895년 수영이 혁파되자 우수영 출신 관리들은 한양으로 올라가 이미 설치된 지도군(신안군)을 폐쇄하고, 우수영에다 진도군 등 신안의 섬을 아우르는 새로운 군을 설치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우수영 주민들도 한양으로 올라가 몇 차례 신문광고로 맞대응했다. 우수영에 군이 설치되면 수영이 있던 당시보다 더 민폐가 심하게 된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에 옥산군의 설치는 무위가 되었고, 더불어 우수영이 서남해 섬지역을 아우르는 중심도시로 발전할 기회도 잃고 말았다.
지난해 문내면사무소에 이어서 올해에는 초등학교가 이전됐다. 핵심적인 관아 복원에 필요한 부지의 확보가 용이하게 됐다. 흉가로 가득한 우수영은 도시화되지 않은 유일한 수영이다. 골목골목 등 공간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역발상하면 민속촌화가 가능하다.
내년이면 전라우수영이 혁파 된지 120주년을 맞이한다. 힘과 지혜를 모아 전라우수영민속촌화의 원년으로 삼고, 우수영의 예술과 문화를 동시에 자원화해 풍요로운 고장으로 복원되기를 기원한다.
해남우리신문
wonmok76@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