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남종합병원 미술전시관을 개관한다는 소식에 백리길을 마다않고 구경삼아 갔다. 개관 전시이기에 그림 밑에 타이틀을 달거나 간단한 작가목록 팜프렛이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다.
좋은 시가 있다면 범속한 시가 있듯이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그림은 품격이라하며 바둑에도 급수가 있듯이 그림에도 급수가 있다.
역대 중국의 동양화론은 이를 모색하고 규정하느라고 미의식을 소진하고 감상자에게 이를 주입시켜왔다. 그 점에서 서양미학보다 세심하고 광대한 탐색을 해온 사실을 내 평생 동서양의 미학을 비교연구하며 알게 된 것 이다. 그러나 지금은 미술사학적 통로가 막혀있다. 인터넷 유행정보가 과거의 인문학적 시절의 작품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림의 품격론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이를 관객은 혼동해서는 안된다.
우선 품격 있는 그림은 누가 만드는가?
고대에서는 권력을 가진 지배층이 규정함으로서 그림은 계급의 반영물이었다. 이후 직업이 분화되면서 ‘화원’이나 ‘도화서’ 같은 전문 관청이 생기면서 그림쟁이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림으로 먹고 살지 않는 사대부층은 ‘문인화’를 내세워 환쟁이보다 우수한 그림을 선보인다는 것이 유명한 동기창의 ‘상남폄북종’ 론이다.
근대로 넘어가면 일제 합병 후 해방된 대한민국은 일제잔재의 총독부 선전을 잇는 ‘국전’으로 활개침으로써 지역 구석구석에 그 영향을 미친다.
그림 중에도 한국화가 호경기를 누리던 시절이라 가령 목포의 남농 산맥이 자리한 곳에는 그의 제자들이 유명세를 떨치면 이를 모방하는 무명화가들의 작품은 다방과 음식점 벽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이것이 광주, 전주, 서울로 독버섯처럼 번지던 시절에 평자들도 원고로 두둑하게 주면 무명을 유명하게 만드는 일이 허다했다. 여기에 조선, 동아 같은 신문의 문화부 기자가 작가의 촌지를 받고 무명을 유명하게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모 작가는 서울의 7개 화랑에서 동시 전시하면서 7명의 평론가 주례사로 치장을 하는 웃지 못 할 사태도 있었다.
전두환 군부정권이 들어서자 온갖 부정비리로 가득한 국전제도를 폐지하게 된다.
물론 국전출세주의자들이 아우성을 치지만, 해외 신자유주의 사조에서 제도미술 폐지가 선진국진입이라는 점을 알려주는 것인데, 국전 추수주의 빠진 이들이 알 턱이 없었다.
2차대전 후 서구나 일본은 제도미술 자체를 없애고 자율성에 맡기었는데 유독 한국만이 국전이 있었다.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이 일어난 것은 광주항쟁 의식의 촉발이지만 미학적으로 보면 국전식 조형미에 정치적 시대의식이 첨가된 것이다. 미술장르 중에도 유화전공의 재능 있는 작가들이 주로 활동하고 한국화는 전멸하다시피 숨어버린다. 어찌 보면 민중미술은 민간인의 자발적 활동이기 때문에 해외미술 사조가 인정한다. 그렇다고 한국의 제도미술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 광주비엔날레, 각 시도의 미술관 등은 정부예산으로 국내작가들을 후원하며 제도권 안으로 흡수한다.
그 속에서도 민중의 고초를 알고 체득한 극소수 작가들이 전투적 신명을 벌인다. 이들이 바로 품격있는 작가로서 세계작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결코 이들은 이름없는 작가가 아닌데도 바쁜 대중들에겐 관심 밖이다.
도시만이 아니라 읍내에도 고층 아파트가 늘다보면 아파트 벽면에 그림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게다가 그림보다 큰 TV 모니터를 장만하고 영상을 즐기다 보니 그간 그림으로 재미 본 화가들은 생존위기에 몰리고 있다. 경기 회복의 가능성도 희박해 더 어렵다.
그림매입의 미술관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많지 않다. 세계가 경제 불황의 늪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같은 불황속에서도 순수하게 그림에만 매진하는 좋은 작가들이 나오리라고 본다. 그것은 작가만이 간직한 영혼의 표상물이며 결국 예술이란 우리 모두가 왜 사느냐 정서적으로 던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