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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이 터진 그는 옥천 북초교에 있던 버스를 동원해 옥천농협 앞에서 31명을 태운 후 해남과 강진, 장흥, 완도 등지를 돌며 광주의 상황을 알리는데 앞장선다.
산이 파출소에서 무기를 탈취했던 양씨는 5월 24일 해남의 5·18이 종료되면서 연행되기에 이른다.
해남경찰서에서 30일 동안 하루 두 번씩 취조를 받았던 양씨는 취조 때마다 당시 보안대장에게 무수한 구타를 당했다. 동지들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도심문에 넘어가 결국 동지들의 이름을 댔던 것이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았다.
양씨는 그렇게 의분에 떨쳐 일어났던 당시의 행동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지금껏 살고 있다. 똑같은 상황이 일어나면 다시 나설 것이라고 말하는 양씨는 30일 동안 취조를 받은 후 밖에 나가서 취조 과정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교육을 3일간 더 받았다. 발설하면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협박과 함께. 그 때문에 5·18 보상과 관련해 광주시청에서 공무원들이 조사차 왔을 때도 그는 두려움에 입을 다물었다.
5·18은 양씨에게 많은 변화를 줬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나눔의 미학이었다. 그는 지금도 매년 12월 말이면 자신이 손수 지은 쌀 12가마로 떡국용 떡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105명에게 4kg 정도 배분을 하는데 유년 시절 굶주림에서 체득한 나눔의 미학이기도 하다.
7년 전부터는 마을 이장도 맡고 있는데, 양씨에게 이장직은 천직이다. 그가 봉사할 수 있는 일이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는 이장수당으로 지급되는 400여만 원도 마을 주민들을 위해 쓰고 있다. 5·18이 그에게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양씨는 또 의용소방대원을 26년 동안 하고 있고, 해남의용소방대장도 역임을 했다. 그는 현재 5·18해남항쟁동지회 회장을 맡으면서 해남의 5·18을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5·18이 사회적으로 민주화를 앞당겼다면, 중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양씨 개인에겐 지역 사회에서 봉사자라는 또 다른 삶의 이정표를 주었다.
박태정 기자/
해남우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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