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영자(편집국장)

법정스님 생가터 매입이 추진되고 있다. 또한 매입된 생가터에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어떻게 기릴 것인가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를 전망이다.
일각에선 생가복원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여러 지자체마다 그 지역의 인물을 기리기 위해 생가를 복원한다. 생가복원은 한 인물을 기리는데 너무도 일반화된 상징물이 돼버렸다. 사람이 살지 않는 생가, 사람냄새가 없는 생가는 울림이 적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생가복원으로 상징화할 수 있을까. 어느 곳에서나 만나는 초가삼간으로 법정스님의 정신을 담아낼 수 있을까. 너무도 일반화된 생가복원을 법정스님에게도 적용할 필요가 있을까는 화두부터 던져야 한다. 모든 지자체에서 만나는 인물들의 생가, 대부분 초가삼간이다. 생가를 찾은 관광객들은 또 그 건물이구나라는 것 이상을 느끼지 못한다.


무소유를 주창했지만 스님의 삶은 언제나 인간을 향했다. 아이들을 돌봤고 타 종교를 껴안았다.
어릴 때부터 늘 책을 가까이 했고 세상에 참사람의 향기를 전하기 위한 활동도 왕성했다.
그래서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더 강한 울림이 있다. 그 울림을 담아야 한다. 강한 울림이 있는 것은 비움이라는 철학 속에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가 크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더불어 살기에 비움의 철학이 크게 온다. 단순히 한 인물을 상징하기 위해 복원된 생가에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묻어있지 않다. 자연과의 관계도 없다.


법정스님 생가터는 모든 이들이 찾아와 그의 무소유 정신을 울림으로 가져가고 숱한 사람들과의 만남의 장이 돼야 한다. 누구나 책 한권 들고 와 책을 읽으며 그의 정신을 공유해야 한다. 
법정스님 생가터는 우수영 선창가에 있다. 이곳 거리는 일제강점기 모습을 많이 담고 있다. 우수영은 거리 자체가 근대건물 박물관이다. 법정스님 생가터 복원은 우수영 근대모습과 동떨어져서는 안된다.


법정스님 생가터는 울돌목의 고뇌하는 이순신 동상을 인접해 놓고 있다. 울돌목의 이순신 동상은 전국 최초로 성웅 이순신이 아닌 고뇌하고 아파하는 인간 이순신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진도에 서 있는, 전국 최대 규모의 큰 칼 옆에 찬 호령하는 이순신동상에선 느낄 수 없는 울림이 큰 동상이다.
조국의 위기 앞에 고뇌하고 아파하는 이순신 동상에서 얻는 그 느낌을 법정스님 생가에서도 느껴야 한다.


만약 무소유 공원이 들어선다고 했을 때도 공원 규모가 크거나 화려해선 안된다. 법정스님의 상징은 옛 초등학교 교정에서나 만날 수 있는 나무의자와 고무신이다. 하나의 상징화된 물품만으로도 그의 정신을 담을 수 있다. 타 관광지에서 만날 수 있는 관광안내 건물도 지역특산품을 파는 건물도 고려해야 한다.


법정은 우수영에서 태어났지만 해남만이 담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한국불교계의 정신적 지주이며 많은 이들의 정신적 표상이다. 전국단위의 의견도 물을 필요가 있다. 법정스님 생가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상징물, 느낌이 크고 울림이 있는 상징, 고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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