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 나라를 애끓게 했던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주년이 되어 갑니다.
뱃머리가 물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아 가던 절체절명의 현장을 지켜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던, 아니 무엇을 할 수 있는 대책이 전혀 없었던 그 날, 시퍼런 물살은 고개를 쳐들고 바다는 입을 벌려 304명의 생명을 앗아갔던 참혹했던 기억이 세월에 묻혀 시나브로 잊혀 가고 있습니다.
‘세월호는 대한민국이었습니다’라는 외침은 메아리처럼 맴돌다 사라지고 1주년이 지나도록 무엇 하나 속 시원히 해결된 것은 없습니다. 세월호 사건과 그 처리 과정은 우렁잇속 같고 위각난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현주소를 거울처럼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세월호’는 여전히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던 외침마저도 어느새 이울어졌습니다. 유족들의 애고로움과 “진실을 인양해 주세요”라는 외침에는 반향(反響)이 없습니다.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절차 협의나 조사 과정에서도 정략적이고 책임 회피를 위한 수세적 태도가 진실 규명을 어렵게 했고 오히려 분열과 갈등만 낳았습니다.
사건 직후에 국민 앞에서 장담했던 이런 저런 입찬말들은 언제나 지켜질 지 난감(難堪)합니다.
지난 1년 동안 ‘세월호’ 참사 처리 과정을 지켜보면서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진실은 하나 밖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진실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 진실이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색깔이 바뀌고, 안개처럼 불투명하고 때론 부풀려지거나 감춰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실이란 단어의 의미처럼 거짓이 잠시 진실을 왜곡하고 감출지라도 영원히 감추지는 못할 것이며 언젠가는 진실은 진실로 드러날 것입니다.
모든 일의 처리가 그렇게 지지부진한 것은 아닙니다.
일 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 참사 처리와는 대조적으로 ‘주미 대사 리퍼트 피습 사건’의 수습 과정은 너무도 신중(?)하고 신속하고 철저했습니다.
한·미 관계에 있어 미국 대사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임에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국민은 어떤 위치에 있을까요?
두 사건의 처리 과정을 보면서 ‘304:1의 비극’이라는 허탈감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인리히 법칙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300번의 신호, 29번의 경고, 1번의 재해가 있다는 말입니다.
1920년대 미국 여행보험사의 손실통제 부서에 근무하던 허버트 하인리히(Herbert W. Heinrich)가 산업재해 통계를 분석하다가 아주 흥미로운 통계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산업재해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큰 재해가 한 번 있었다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작은 사고가 29번 있었고, 또 운 좋게 사고는 피했지만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사건이 무려 300번이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인리히 법칙이 주는 교훈은 사소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이를 면밀히 살펴 그 원인을 파악하고 잘못된 점을 시정하면 대형 사고나 실패를 방지할 수 있지만, 징후가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지금도 하인리히가 말한 전조증상(前兆症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북이 대치한 정치 현실, 빈곤의 대물림과 양극화, 불안한 노후 문제, 노사문제 등은 피로사회, 위험사회, 분노사회의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국가 거대자금의 붙투명한 투자, 폭증하는 가계부채, ‘삼포세대’의 젊은이들의 모습은 빈발하는 경고등입니다.
한계를 벗어난 천재지변이나 재해는 어쩔 수 없지만, 전조증상을 간과(看過)한 인재 앞에서 다시는 가슴을 치는 일들이 없기를 빕니다.
수많은 참사와 고통 속에서 교훈은 충분히 얻었습니다. 유념할 것은 고통 자체가 교훈이 되지는 않습니다. 고통의 처리 과정이 진정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 낼 때에 고통은 교훈이 됩니다.
포기할 수 없는 세월이 흘러갑니다. 세월에 편승(便乘)해 애멸(埃滅)하기를 바라는 것이 약이 아니라 그 교훈을 잊지 않는 일이 약입니다.
지금도 팽목항 파도소리에는 ‘살려주세요’라는 희생자들의 목소리가 실려 있음을 잊지 맙시다.
제발, 세월이 약이 되지 않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