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동석(목포대 명예교수)

‘아픈 과거로부터 역사를 배우지 못한 민족은 불행하다. 왜냐면 불행은 미래에서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히틀러 나치독일인이 유태인 700만명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한 만행에 대해 서양인이 쓴 추도문이다. 현재 독일은 민주화의 검증이 오히려 승전국 미국보다 예리하고 신랄하다.
광주5·18 참상을 국내 신문방송매체가 모두 통제하고 있을 때 독일방송이 미국보다 앞서 전 세계로 알린 것은 너무도 유명하다.


우리는 어떠했는가? 국외뉴스도 차단된 곳에 갇혀 왜곡된 편향으로 점철했다. 5·18의 상징인 ‘님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행사의 합창곡으로 부르는 것을 박근혜 정부는 금지하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양철북’을 쓴 퀸터 그라스 작가는 자신이 히틀러 치하의 사병으로 복무한 경력에 대한 죄의식으로 육체가 자라지 않은 난장이, 북치는 소년 오스카로 변신해 정신병동에 갇힌 환자의 눈으로 전쟁의 광란에 휩쓸려가는 독일시민의 잔혹한 행태를 치밀하게 묘사하고 풍자했다.


양철북은 여자의 자궁이 열리고 오스카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매우 충격적 촬영기법의 영화로도 선보여 그해 유럽 최고의 영화상과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솔직히 나는 영화의 매혹에 사로잡혀 양철북 소설을 독파하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그의「25시」가 약소국의 비애를 묘사 풍자함으로 독자의 심금을 울렸고 이태리 명배우 안소니 킨이 출연하는 동명의 영화로도 선보이었으나 양철북에는 미치지 못했다.


2차 대전에 승리한 영국은 그들의 영웅담을 과장되게 떠들어도 패전국 독일에서는 함구무언(緘口無言)일 수밖에 없는데 양심적인 그라스가 왜곡보도를 참지 못하고 진상을 밝힌 소설이「게걸음으로 가다」이다. 영국에 독일 공습을 주도했던 E.해리슨 경의 동상이 세워졌다. E.해리슨 경이 주도했던 ‘드레스덴 공습’은 한 시간에 50만명의 민간인을 살상하고. 드레스덴 시민들의 소중한 문화유산과 생활 터전, 그리고 문화유산을 앗아갔다. 결국 전쟁은 어느 한 쪽이 극심한 피해를 받아 항거불능의 상태가 될 때 승자와 패자의 갈림길이 되는데 히틀러의 무고한 유태인 학살인 홀로코스트는 크게 보도돼 세계의 동정을 받는 대신 선량한 독일시민이 받은 피해는 히틀러 통치의 국민이라는 범주에 묶여 무시된 것이다.


독일이 받은 역사적인 피해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짐만이 자신들의 저지른 잘못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게걸음으로 가다’는 독일 언론에서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주변 국가들로부터 ‘신 나치 부활’이라는 비난과 우익적 행보로 오해를 받는다.
그는 오직 작가적 진실성을 견지한 독일문단의 멘토였다. 역설적으로 승전국인 영국이나 미국은 그에 비견할만한 작가를 배출하지 못했다. 승전국인 이들은 2차대전을 소재로 삼아 문학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것이다. 미국은 소설보다 전쟁소재의 영화가 대중의 인기를 끌었고 미국 LA에 자리한 헐리우드 영화사는 세계시장을 재패하며 신흥 자본으로 등장했다. 말하자면 패전국은 죄의식의 고뇌에 빠져 있다면 미국은 전쟁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흥성을 누리며 소련과 대결하는 반공체재로 제국주의로서의 지배력을 행사한다,


독일은「양철북」을 발표한 이래 1990년 통일 당시까지 전범의 무한 책임과 ‘지금 이 시점에서도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던 게 좌파적 입장을 띤 귄터 그라스의 윤리 의식이었다. 그런 입장의 귄터 그라스가 자칫 극우주의자들의 입장과 동일시될 수 있는 소재를 다룬 것은 이들 죽음이 인터넷 세대인 현재, 미래의 세대에서 단순히 활용되었을 경우, 그들이 겪은 고통이 왜곡되고 은폐돼 전달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사실들이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이용될 때에는 사실의 왜곡을 떠나 폭력이라는 현실적인 위험이 정당성을 가지고 나타날 수 있기에 역사를 제대로 알고 받아들이자는 의도이다.
우리의 문학입문시절은 독일의 헤르만 헤세의 교양적 성장소설이 널리 읽혔으며 귄터 그라스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업적은 전후 문호로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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