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희(북 멘토)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의 이익관심은 동등한 고려 가치가 있으며, 이들을 종에 근거해 하찮은 미물로 취급하는 것은 인간을 피부색에 따라 차별하는 것보다 더 낫지 못하다. 지성이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동물이 존중받아야 한다.”
동물 해방 운동가 사이에서 사상적 기반이 되는 철학적 선언으로 널리 읽히는 책인 ‘피터 싱어’의『동물해방』의 핵심문장이다. 요즘 이 문장이 필자에게 갑자기 번개처럼 뇌리에 들어와 박혔다.
지난 7월1일 필자의 아파트에 새 식구가 생겼다. 어미에게 버려진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거두어 키우던 지인에게 부탁해 반려동물로 받아들인 것이다.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새끼고양이들과의 동거는 아직까지는 성공적으로 서로에게 적응해가고 있는 중이다. 마치 아기 돌보듯 사료를 챙겨주고, 배변을 치워주며 한 이불 속에서 셋이서 사이좋게 누워서 잠까지 잔다. 필자가 일어날 때까지 밥 달라고 떼쓰거나 울지도 않으며, 잠을 깨울세라 조용히 옆에서 논다. 또 집에 들어갈 땐 둘이서 현관까지 마중 나와 반겨준다. 마치 가족들이 그러듯이 말이다. 반려동물의 수준을 넘어서 한 가족이 된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필자에게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이전에는 사람에 대한 권리만을 고민했다면 이젠 반려동물을 포함한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도 관심이 생긴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우월한가에 대한 관심이다. 과연 ‘지성’과 ‘이성’의 유무로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을까?


동물을 학대하고 착취하고 그것이 정당하다고 이야기하는 종차별주의자들은 다양한 논리로 자신들의 종차별을 합리화하며, 많은 사람들은 간단하고도 당연하다는 듯이 “인간과 동물은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 동물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애착, 공감, 사랑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며 영장류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며, 모든 사회적 포유류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성이다’라고 주장한다. 지성과 이성의 유무만으로 인간과 동물의 차별이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먼저 인간이 동물에 비해 더 ‘지성’적인지 살펴보자.


“간단히 말해 다른 사회적 동물에 비해 유난히 발달한 영장류 ‘지능’의 특성은 두 가지 필요, 즉 상대방보다 더 교묘한 계략을 짜고, 더 철저히 거짓말을 해야 할 필요에 의해 발달했다. 우리는 더 지능이 높아졌기 때문에 동료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고, 우리의 목적에 맞게 정확히 상대를 능가해 속이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너무 인간에 대해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당부분 수긍이 가는 말이지 않는가?
다음으로 인간이 동물에 비해 더 ‘이성’적인가? “우리가 인간을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인간은 스스로 악의 가능성을 조작하는 동물일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이 약하다는 이유로 부족한 도덕성을 변명하고 있다는 명징한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인간은 더 이상 변명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그리고 신념을 지켜낼 수도 없을 만큼 약해졌기 때문이다”라며 ‘마트 롤랜즈’는『철학자와 늑대』라는 책에서 인간 이성의 약함과 사악함을 도리어 지적한다. 역사적으로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비이성적’ 행위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것이 현실이 아닌가?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동물 복지에 대한 인식은 어떨까? 동물에 대한 인식은 예전에 비해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그들의 이익과 인간의 이익이 큰 충돌이 없을 때에만 고려의 대상이 된다.
만약 동물의 이익이 인간의 이익과 충돌이 된다면 인간 아닌 존재들은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며 그들의 이익은 무시된다.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이야기 한다. 그 더불어 사는 세상에 인간만이 아닌 동물들 그리고 자연의 생명들도 포함되면 더 좋지 않을까?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모든 생명들 덕분이지 않는가?
새끼 고양이들이 배가고플 시간이다.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가 한 번씩 안아주고 사료를 챙겨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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