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연호(해남군행정동우회 회장)

옛말에 ‘노자무용’ 이라했다. 풀이하면 늙은이는 쓸데가 없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마도 이 말이 회자될 때 평균수명이 환갑(60세)도 못됐던 때이고 실제로 농경사회에선 이 나이 노인들은 퇴물이었을 것이다. 삼국시대 얘기지만 늙고 병든 노인들은 고려장으로까지 몰리는 시대도 있었다. 하기야 요즘에도 위정자들의 잘못이겠지만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면서 멀쩡한 청장년들을 조기퇴직으로 내쫓는 사회가 되고 있다.


하지만 시대가 너무도 많이 변했다. 인생 100세 시대, 지금 60대는 한창 일할 나이이고 70대도 활기 넘치는 장년시대인 게 현실이다. 특히나 지금의 60~70년 배는 우리나라 조국근대화의 역군이었다. 고픈 배를 움켜쥐고 새마을운동을 시작으로 치산녹화와 녹색혁명 등은 모두 이들이 이룬 공적이다. 또 봉제공장에서 파독 간호사와 막장광부, 파월장병들의 피땀까지 그들이야말로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빛나는 산업전사들이었다.


일찍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이 나라를 지켰다면 이 시대의 산업역군들 이야말로 근대화된 조국을 만들어낸 창조자들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에 와서 이런 노병들의 헌신적 삶을 잊는다거나 과소평가한다면 많이들 서운해 할 수밖에 없다.


노인은 진정 쓸모가 없는가!
앞에서 잠깐 노자무용론의 시대적 배경을 말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쓸모가 많은 사회라고 말하고 싶다. 예를 하나들자면 지금 KBS1의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고 있는 송해나 이어령의 100년 서재를 맡고있는 이 교수를 과연 이시대의 고루한 노년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여정에서 모두들 후회 없는 삶을 말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누가 필자에게 인생을 묻는다면 “인생은 경험과 후회”라고 말하겠다. 살아보니 매순간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게 인생이었고 그때를 지나고 나서야 후회하고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철학자가 인생을 초년의 방황과 투쟁의 중년, 후회의 말년으로 나눈 뜻에 공감한다.


경험자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 후배들의 삶의 역정은 어느 면에선 먼저 살아온 내가 겪은 과정이고 경험이다. 따라서 경험 많은 노년들의 지혜야말로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만 지금 노년세대들의 경험 중엔 첨단디지털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우리노년들도 이제 급변하는 시대의 환경적응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또 앉아서 대접만 바랄게 아니라 사회에 어떤 보탬을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있어야 한다. 아울러 정부는 60~70대 들의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경험기부 등을 펼 수 있는 법적 제도적 보완책 마련에 더 힘써야 할 것이다. 역사는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 시대 노년들을 푸대접한다면 머지않아 그들 역시 홀대받을게 뻔하다. 다시 말하면 내일은 오늘에서 비롯되고 오늘은 다시 내일이 된다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지금 우리사회는 초고령 사회로 가고 있는 중이다. 관련하여 현행 제도상으로 보면 대한노인회는 사단법인체다. 알려진 대로 사단법인체는 정부기구가 아닌 사람 즉 노인들의 모임체에 불과한 것이다. 광범위하고 중차대한 노인들의 위상과 복지문제를 사단법인체가 이끄는 데는 여러 한계가 있다.


노인인구 670만 시대, 정부는 언제까지 이 거대한 조직체를 사단법인체로 둘 것인가. 이 기회에 필자는 대한노인회의 법적기구화를 제안 한다. 즉 특별법을 만들어 독립기관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대한노인회 또한 이 문제를 당당하게 공론화하고 정부설득에 나서주기 바란다. 노인후생, 복지문제는 자존심 상하는 노인일자리사업(월20만원) 말고는 지금의 대한노인회의 조직, 운영지원과 여타 노인복지사업에 들어가는 예산 수준이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노인들은 지금의 시혜적(?) 후생, 복지를 넘어 이 나라의 원로들로서 어느 누구의 예속이나 간섭 같은 것이 없는 독립적인 예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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