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수진(해남제일중 2년)

진호가 하는 이야기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군고구마를 팔고 계시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모습에 자꾸 시선이 갔다. 무슨 생각으로 학교 근처에서 장사를 하시는 건지, 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혹시라도 내 이름을 부르진 않을까 불안한 마음뿐이었다. 만약 날 부르신다면 분명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아직도 고구마를 팔고 계시는 아버지의 유난히 크고 걸걸한 목소리가 교실 안쪽까지 울려퍼졌다. 퍼지는 아이들의 웃음. 새빨개지는 내 볼, 욕을 내뱉을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내 꼴은 보나마나 웃길 게 뻔했다.
이야기할 기분이 들지 않아 책상에 힘없이 엎드리자 옆에서 왜 그러냐며 툭툭 치는 진호를 무시했다. 내 기분도 모르면서 자꾸 건드는 진호가 밉기만 했다.
그냥 수업시간 내내 계속 엎드려 있었다. 멀쩡히 수업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학교를 마치고, 어느새 하교 시간이 되었다. 여전히 교문 앞에서 군고구마를 팔고 계시는 아버지. 진호는 자꾸 빨리 집에 가자며 재촉만 한다. 끌려가다시피 도착한 아버지 앞을 그냥 뛰어갔다. 아버지께서 아는 척을 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얼굴을 가리고 뛰고 있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의 멍한 시선이 나를 향해 있는 것도 같았다.

집에 도착해서도 아버지의 눈이 계속 아른거렸다. 무언가 묘한 마음에 괜히 하지 않았던 공부를 해보기도 하고, 노래도 따라 불러봤지만 이상한, 답답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야만 속이 풀릴 것 같아서 침대에 누워 그냥 잠만 잤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서 그냥 푹 잠만 잤다.


그렇게 몇 시간을 잤을까? 끼익하고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아버지께서 술을 마신게 틀림없었다. 분명 장사는 10시 남짓에 끝나실 텐데 무슨 일로 또 술을 마시신 건지. 혹시 낮에 내가 피한 것 때문에 잔뜩 취하셔서 오신건지 맘이 죄책감 때문에 점점 무거워져갔다.
뻘쭘한 표정으로 방을 나간 채. 머리를 긁적이며 아버지께 인사를 건넸다. 언제나와 같이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마음을 놓았다. 다행이다. 아버지의 마음보다 내 안위를 먼저 생각했던 내가 싫었지만 안심하고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날 방으로 불러들이셨다. 왜지, 왜 갑자기, 초조하고 긴장이 돼 주먹을 꽉 쥐었다.
살을 파고드는 손톱이 아팠지만, 차라리 이대로 상처라도 나서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상상을 하는 동안 어느새 내 몸은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침대에 앉아계시는 아버지가 옆자리를 툭툭 치셨고, 그 옆에 앉은 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날 혼내실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아버지께선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셨다. 날 처음 얻었던 이야기, 직장을 가지게 된 이야기. 그리고 직장에서 쫓겨나 고구마 장사를 하게 된 이야기.
아버지는 약하신 몸과 나이 때문에 직장을 잃고 까마득해진 정신 속에서 유난히 군고구마를 잘 먹던 내가 생각이 났다고 하셨다. 그리고 고구마를 팔면서도 때때로 다른 일도 같이 하신다고 내게 이야기 해주셨다. 아침엔 신문을 나르기도 한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은 무거운 목소리였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아침에 집을 나가시고 밤늦게 들어오시는 아버지의 모습. 어렸을 때, 난 유난히 고구마를 좋아했다. 오죽하면 밥을 먹기 싫어했을 때 고구마를 주면 허겁지겁 먹어치웠다고 했을까.
마음이 찡해왔다. 아버지께 죄송하다고 겁이 나서 그랬다고 털어놓았고, 아버지는 날 껴안아주셨다. 앞으로는 아버지와 고구마를 피하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하였다.


아마도 아버지와 사이가 더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고구마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음식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안겨있는 아버지의 품이 그 어디보다도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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