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연호(해남행정동우회장)

그날의 울돌목은 지금도 어김없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장군으로 분한 대역배우의 쩌렁쩌렁한 호령소리는 어느새 우리를 418년 전 명량해전의 아침으로 이끌었다.
세계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명량대첩 승리의 함성소리가 좁은 바다위에 울려 퍼지는 내내 현실적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의문점이 나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어떻게 겨우 12척의 배로 133척의 적선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사실이지 않는가. 결국 이 기적 같은 해전의 승리 요인은 탁월한 지도자의 강한 정신력과 사명감의 승리였다고 조성욱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은『명량해전』논문에서 말하고 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 했다. 또 공은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하면 살 것이다”라는 명훈을 남겼지만 당시 수적으로 엄두를 낼 수 없는 전황에서 휘하장졸들과 민초의병들의 항전의지를 곧추세울 수 있었다는 게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만큼 공은 당신과 함께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믿음과 존경의 대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공은 다시 어떤 환경이나 어려운 처지에서도 결코 상대를 탓하지 않았다. 나라를 향한 강한 충성심을 바탕으로 주어진 여건 속에서 묵묵히 의연하게 자기 길을 걸어갈 뿐이었다. 또 하나 공은 부당한 압력이나 청탁에는 올곧게 따르지 않았다.
아울러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일에는 삭탈관직을 당하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공의 숭고한 유훈이야말로 뒷날 끈질긴 항일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고 오늘도 우리 모두 당신을 추앙하고 그리워하는 이유이다.


또 비록 혼탁한 사회지만 지금도 달려오는 열차선로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하는 등의 의인이 있는가 하면 긴박한 군사대치 상황에서 제대귀가를 반납하는 충성스런 국군장병들도 있어 이 모두는 아마도 그동안 면면히 이어져오는 공의 애국 애민정신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문제는 이 시대 정치인을 비롯한 모든 사회 지도층의 생각과 행태일 것이다. 말인즉 너도나도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일이라고들 하지만 지나고 나면 모두가 속은 느낌뿐이다. 매사 상대 탓만 하면서 전쟁만 일삼는 정치권이나 객관적 사리 분별없이 소속 기관단체나 개인적 이해득실에만 매몰되는 세태 속에서 우리는 다시 공을 추모하고 그리워하게 된다.


공은 이렇게 말했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오지의 말단 수비 장교로 돌았다.”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말라.”
“나는 평생 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말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아들 둘과 함께 전쟁터에 나갔다.”
“자본이 없다고 절망 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와 전쟁터에서 12척의 남은배로 130여척의 적을 막았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말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 진후 마흔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의 불화로 몇 차례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말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 번 싸워 스물세 번 이겼다.”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 갖지 말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뺐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둘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합격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랐다.”


아…, 공께서는 하늘나라에서 지금의 우리 모습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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