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석천(전 해남동초 교사)

역사는 말을 합니다. 역사는 묻힌 이야기들을 캐내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합니다. 사관(史官)이 당시의 역사를 어떻게 기록했든지 간에 진실을 감추지는 못합니다.
19세기 독일의 랑케는 역사란 ‘그것이 본래 어떻게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즉, 과거의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또, 로마의 현인 키케로는 ‘과거의 역사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스승이다’고 했습니다.
중국문화권에서 훌륭한 군주로 추앙하는 요순(堯舜)시대의 이야기가 아직도 전해지고 있는 것처럼. 
요 임금이 민심을 살펴보려고 평복을 하고 거리로 나섰다가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우리 백성을 살게 하는 것은 모두가 임금의 지극함 아닌 것이 없다. 느끼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임금이 정해준 대로 살아가네.’


아이들이 ‘우리 백성을 살게 해 주심은 임금의 지극한 덕’이라고 부르던 노래를 ‘강구요(康衢謠)’라고 합니다. 또, 요 임금은 거리에서 한 노인이 길가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한 손으로는 배를 두들기고 한 손으로는 땅바닥을 치며 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 노인이 부른 노래가 ‘격앙가’입니다. 격앙가는 땅을 치며 노래한다는 뜻으로 풍년이 들어 태평한 세월을 부르는 노래입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고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으니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정치란 정치의 고마움을 알게 하는 정치보다는 그것을 전혀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 정치가 진실로 위대한 정치라는 의미를 담은 노래입니다.


‘요순시대’는 중국에서 이상적인 정치가 베풀어져 백성들의 생활은 풍요롭고 여유로워 심지어는 군주의 존재까지도 잊고 격양가를 부르는 세상이었고, 정권 이양은 가장 이상적인 선양(禪讓)이라는 방식으로 다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순시대’는 지금까지 태평성세를 표현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요순시대의 역사를 지금도 말함은 역사는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우, 장기 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했던 이승만 정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후 강력한 경제 성장 정책으로 눈부신 경제 발전을 달성했으나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을 했던 박정희정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던 전두환 정부, 엄청난 부정부패 자금을 축적해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던 노태우 정부가 있습니다.


정권 출발 시에는 참신성을 강조했지만 경제 위기를 불러왔던 김영삼 정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의 극복과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 등을 통해 국가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대북 송금 과정 추진을 투명하게 추진하지 못했다는 오점을 남긴 김대중 정부도 있습니다.


합리적인 개혁 정부, 국민통합 정부, 열린 정부, 희망의 정부를 지향했으나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이 급증하고 서민들의 경제는 침체됐다는 평가를 받는 노무현 정부, 4대강, 자원외교 등을 통해 막대한 국고를 낭비했고 빈부격차를 확대시킨 이명박 정부의 실상을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던 현(現) 정부의 실상을 나중에 말할 것입니다. 


역사의 교훈을 볼 때 국민 위에 군림했던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하며 그런 권력은 폭력이 됩니다. 또한, 어떤 지도자나 정부이건 간에 위대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기려 하는 것보다는 국민의 가슴을 이해하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스토리를 가진 정부가 훌륭한 정부요 지도자일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 킹은 말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었다고.”
요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역사는 묻히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거는 기대는 역사는 말을 하며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사 앞에서는 그 사람과 집단의 처음이 나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이 처음을 결정합니다. 그것이 역사의 위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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