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남주 (국민대 교수)

요사이 자주 꿈을 꾼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배경과 인물은 1970년대 초반까지 살았던 오막살이 초가집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이다.
오막살이집은 기억에도 생생하다. 큰방과 작은방 사이에는 정개, 허청개의 디딜방아, 양철로 땜방한 썩은 판때기 문의 마래에는 설 무렵에 꼭 물엿 단지가 있었고 그걸 몰래 홀짝홀짝 훔쳐 먹었다. 마래 옆 짚 덤불 속에는 막걸리 항아리와 내가 손수 만든 토끼집이 2층으로 있었고, 그 옆에 돼지막과 소마 구청이 함께 있었다. 안방문은 댓가지로 얼기설기 엮어 덕지덕지 창호지를 붙인 쪽문이었기에 어린 나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문틀에 머리를 박치기 하곤 했다. 또 안방 문에는 흔히 밖을 내다보기 위하여 손바닥만 한 투명유리를 붙이지만 우리 집은 유리마저 없어 인기척이 나면 꼭 문을 열어야 했다.
엄동설한에 찬물로 세수를 하면서 실내에서 세수하는 집을 꿈꾸었다.
오막살이집에 대한 그릇된 생각은 100년도 넘은 집으로 할아버지가 처가살이를 했다는 내력 등을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으면서 바뀌었다. 이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 나의 참모습 즉, 정체성은 오막살이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해남 촌놈이다’ 이른바 커밍아웃(coming out)을 한 셈이다. 이후로 촌놈이라는 호칭은 욕으로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서울에 가서도 고향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고 ‘해남촌놈=해촌’이란 게 자랑 아닌 자랑이 됐다. 요즘 애들은 덩치만 큰 디지털 세대다. 손바닥 핸드폰만 쳐다보고 혼자서 논다. 따라서 농업 공동체를 모른다.
농촌은 1980년대 기계화와 더불어 빠르게 서구화의 길을 걷게 됐다. 전국 최대 농군인 해남도 예외는 아니다. 얻은 것은 편리함을 얻었지만 잃은 것도 많다. 그중에서도 진정한 농촌다움이나 미풍의 공동체 문화가 급속히 사라졌다. 다행히 해남에는 타 지역에 비해 다양한 공동체 문화가 많이 잔존해 아직도 비지정 민속문화의 보고다.
농악으로 송지의 진법 군고, 대동놀이로 남창과 우수영의 전통 줄다리기, 농사일을 하면서 불렀던 우수영 남자 들소리, 해남의 오구굿 등이 전한다. 이외에도 각처에 상여소리, 마을굿이나 기우제, 다양한 민속놀이 등도 있다.
한발 더 나아가 해남은 예로부터 서편제 판소리의 중심지요 대흥사는 풍류처의 핵심이었다. 판소리에 장단을 맞추는 고수꾼이 많은 것 또한 그 증거이다. 서편제 영화에서와 같이 사실도 그러했다. 혹자는 해남에 무슨 중요한 민속이 있느냐고 묻지만 내가 모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공동체 문화 속에는 해남의 정체성이 들어 있어 더욱 소중하다. 이를 지켜내지 못하면 해남의 정체성이 모호해질 수도 있다.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문화는 해남지역의 미래 경쟁력을 제고 시킬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이를 갈고 가꿔 후세에 전하는 일은 우리 세대의 몫이다. 후손들에게 정체성을 만들어줘야 할 의무가 우리 어깨에 있다. 우선 무형문화와 관련된 현장의 삶을 문자, 사진, 동영상 등으로 기록화해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다듬어 전승을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그런데 이러한 공동체 문화는 무형이고, 기능보유자들이 80대 고령자인 까닭에 서두르지 않으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노인 한 명이 사라지면 박물관 한 개가 사라진다’는 격언을 깊이 새기고, 지금부터라도 민관이 지혜를 모아 무형문화를 갈고닦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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