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석 천

(전직 교사)

유세(遊說) 소리가 요란하다. 요즘 가장 흔한 담론(談論)은 20대 총선과 맞물린 정치 이야기다.
우리 지역 출신 최재천 변호사는 말하기를 “술잔을 나누면서 정치인을 욕하는 것 그것도 정치다. 또, 대통령을 평가하는 건 미(美) 국민의 가장 보편적인 스포츠다”고 했다. 정치인에 대한 평가나 비판을 하는 것, 평가 결과에 따라 투표를 하는 것은 주권자의 자기 결정이기에 당연히 정치 행위다.
정치란 정부나 국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가정에도 있고, 가게에도 있고, 회사에도 있으며 국민이 생활하는 곳곳마다 상존(常存)하고 있다. 따라서 국민의 삶과 동떨어진 개념만의 정치는 허구다.
사전은 ‘정치(政治)란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또, 공자는 말하기를 ‘바른 마음과 자세로 세상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궁극적으로 백성들이 행복을 누리는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정치 모습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데에만 온갖 정성을 쏟고 있는 모양새다.
얼마 전 종영된 ‘육룡이 나르샤’라는 드라마의 대사가 귓전에 맴돈다. 극(劇) 중 인물인 정도전은 “정치란 나눔이요 분배다. 당신들은 누구에게 빼앗아 왔고 누구의 배를 채웠소?”라고 권문세족들에게 소리쳤다. 정도전의 소리는 서민의 가슴을 대변한 것 같아 속이 시원했다.
마하트마 간디의 묘비에는 일곱 가지 사회악이 적혀 있다고 한다. 그중 원칙 없는 정치(Politics without Principle)는 첫 번째 죄악이다.
정치의 원칙이란 국민이다. 링컨 대통령의 연설처럼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것이 정치의 근본이다. 또, 국민의 결핍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정치의 몫이다.
우리 정치 모습은 어떠했던가? 국민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했고, 말로는 민생을 외치지만 ‘흙수저’에게는 야멸차고 ‘금수저’에게는 관대했다. 지역 패권주의, 계파 이기주의는 극에 달했으며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한 치열한 다툼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번 선거전도 무지개 약속과 선동, 대통령 마케팅, 포퓰리즘(populism)은 예나 동일하다. 덧붙여 읍소(泣訴) 전략까지 동원되고 있다. ‘국민을 위해’라는 말은 희귀하다.
이번에 출사표를 던진 후보자 절반이 세금을 안 냈거나 군대에 안 갔거나 전과가 있다고 한다. 그런 이들이 국민의 행복을 열어 줄 책무를 지닌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나섰다니. 어찌 민본(民本)을 말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더라도 선택은 유권자의 몫이다. 정치를 맡길 정치인을 뽑는 일이 유권자들이 할 수 있는 정치다. 투표는 정치 성숙을 위한 권리 행사이며 정치 소비자인 유권자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아무리 정치 현실이 미덥지 못하더라도 국민의 권리인 선거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정치 혐오(嫌惡)만으로는 정치를 바로잡을 수 없다. 투표를 통한 권리 행사, 그것은 권리임과 동시에 정치 개혁을 위한 천명이며, 대의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길이다.
이번엔 과거의 흠집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정치질’을 하지 않고 정치를 하겠다는, 앵무새처럼 말만 잘하는 ‘정치꾼’이 아니라 양심적이고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 실천 가능한 지역 현안과 낙후된 지역 발전을 위한 비전을 제시하고 ‘흙수저’들의 발을 닦아줄 만한 인물을 세워야 한다. 그것만이 주권자의 정치요, 결정권이요, 실정(失政)에 대한 심판이며 정치 개혁의 길이다. 13일에는 투표장으로 가자.  깐깐한 투표를 통해 유권자의 손으로 정치를 성숙시키자.
우리 정치에도 봄이 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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