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상 영(향토사 연구가)

비석이란 강도가 높은 돌을 연마해 목적한 글의 내용을 각자 한다. 그리고 비석에 새긴 글을 금석문이라 칭한다. 비석에는 기적비, 공적비, 추모비, 송덕비, 세천비, 묘정비, 경계비, 어록비, 시비 등 종류도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에는 묘정비가 가장 많다. 주로 자기 조상에 대한 공적이나 연보 등을 새긴 묘비이다.
그런데 비석 중에 글씨가 한 자도 조각되지 않은 비석이 있다. 이를 백비(白碑)라고 부른다. 문헌상에 백비는 청백리가 죽은 후에 청렴하게 살다간 흔적을 남기기 위해 왕명으로 세웠다고 한다.
남도지방에는 장성군 출신 조선 성종 때의 문신이었던 박수량 공의 묘정에 백비가 세워져 있다. 호조참판까지 올랐던 박수량은 30여 년 공직생활을 했는데도 퇴직 후에 자기 몸을 의지할 집 한 칸 없는 청백리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조선조 516년의 역사 속에서 박수량처럼 청렴했던 청백리가 몇 사람이나 있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청백리 사후에 세웠다는 백비가 마산면 송석리 월산마을 뒷산 능선에 존재한다. 이 산은 원주이씨 예건파의 종중산인데 여기에 백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 산에 올랐다. 잘 조성돼 있는 묘원 앞에 백비가 서 있었다. 
풍수학에서는 산을 용(龍)이라 칭하고, 그 산에서 흘러내리는 산줄기를 맥(脈)이라 하며, 산소가 있는 형국을 혈(穴)이라 하고, 묘를 조성하는 장소를 국(局)이라 하는데 이 산소는 좌청룡 우백호 현무 주작까지 갖춘 길지(명당)였다.
이곳은 원주이씨 이창호 씨의 13대 조부인 사정 이예건(司正 李禮建)공의 산소가 자리 잡고 있는 묘원이었다. 백비는 이예건 공의 산소에서 5m쯤 아래의 큰 봉분 앞에 서 있다. 또 백비의 주인공인 아들, 손자들로 추정되는 6개의 묘가 있는데, 그 묘원 안에 2기의 큰 문관석도 서 있고 백비 앞에 놓인 상석 또한 대형이었다. 당시 인력을 동원해 조성된 묘원치고는 봉분의 크기나 석물의 웅장함으로 보아 평민의 묘는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현재 묘는 연고자가 없어 원주이씨 문중에서 조상 묘와 같이 연중 벌초를 하며 깨끗이 관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 지역에선 큰 벼슬을 한 이가 없는데 궁금증이 더해졌다. 따라서 엉뚱한 억측도 해 보았다. 마산 맹진 출신 중 조선시대 유명한 풍수가인 이의신이 있다.
이의신은 옆 마을 서당을 다녔다. 그의 유년에 얽힌 ‘백여우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이의신은 조선조 광해군 때 지관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왕실의 묘역공사에도 참여했고 광해군의 신임도 두터웠다. 그는 서울을 경기도 교화 땅으로 이전해야 국운이 계속 번창한다고 왕께 진언했다가 반대파들에게 역신으로 몰렸다고 한다. 이후의 그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원주이씨들의 전언에 의하면 그 후손들이 여기서 오래토록 살았으나, 지금은 영암군에 방계손만 살고 있고 왕래는 없다고 한다.
백비가 세워진 묘역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이며 후손은 또 누구인지 궁금증만 더해진다.
원주이씨 예건파 문중에서 이 산을 소유한지도 어언 4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아직까지 백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기록이나 구전이 없다. 향토사를 연구하는 후학들의 연구과제로 남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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