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 남 주(국민대 교수)

1913년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노인이 빵을 훔치다 걸려 그 죄를 묻는 재판이 열렸다. 판사는 노인에게 그 죄에 대한 사유를 물었다. 노인은 “사흘을 굶어 빵을 훔치게 됐다”고 답했다. 이에 판사는 단호했다. “처지는 딱하나 법에는 예외가 없소. 벌금 10달러를 내시오” 누가 봐도 가난한 노인에게는 과중한 벌금형이었다. 예상을 벗어난 판결에 방청석은 술렁거렸다. 그때 판사는 자기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 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벌금은 내가 대신 내겠소. 그동안 나는 좋은 음식을 많이 먹은 죄에 대한 벌금입니다. 여러분도 이웃이 빵을 훔쳐야 할 정도로 도움을 주지 않은 죄로 50센트의 벌금에 처합니다” 이러한 판결로 모인 돈은 무려 47달러 50센트나 되었고, 배고픈 노인의 손에 쥐어졌다.
이러한 명 판결을 내린 판사는 피오렐로 헨리 라과디아(Fiorello Henry La Guardia, 1882~ 1947)이다. 그는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법조인이자 미국의 5대 저명한 정치인이다. 뉴욕 시장에 3번 당선돼 1934년부터 1945년까지 청렴하고 미래 지향적인 시정을 이끌었다. 그 결과 뉴욕은 세계 최고 도시로 발돋움했다. UN본부, 맨하탄과 월스트리트 그리고 브로드웨이 등은 뉴욕의 상징이다. 이런 눈부신 발전의 배경에 라과디아의 업적 몇 가지만 열거해 보자.
먼저 그는 부정부패한 시정을 바로 잡았다. 1930년 대공황시대, 부패한 권력의 배경에 시정을 좌지우지하던 ‘태머니홀’이란 막강한 민주당 당파가 있었다. ‘태머니홀’은 사무실 건물명에서 비롯하는데, 이민자의 자립을 돕는 순수한 일에서 출발해 막강하고 부패한 권력으로 성장한 민주당 파벌을 말한다.
시장으로 당선된 라과디아는 80년에 걸친 태머니홀 부패권력에 마침표를 찍었다. 일례로 마피아 두목인 루치아노는 자신도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라과디아에게 뇌물을 주려다 거절당했다. 오히려 시장은 뉴욕 시의 실권까지 장악하고 있던 마피아 소탕 작전을 벌이고 루치아노도 검거했다.
두 번째는 당시 민주당 출신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발표하자 라과디아 자신은 공화당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뉴딜 정책을 지지했다. 루스벨트가 재선에 도전하자 또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해 경제공황을 극복하는데 일조했다. 세 번째는 라과디아 시장의 문화정책은 뉴욕이 미국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게 하고 브로드웨이 성장에도 기반을 닦았다.
1943년 뉴욕 시티 오페라단을 창립해 오페라를 대중화시킨 다음 오페라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 오페라단원들에게 수천 명의 학생들을 체계적으로 지도하게 했다. 이는 미국 예술 교육의 모델이 됐으며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성장한 뉴욕의 두 공립예술고등학교는 1984년 통합돼 라과디아예술고등학교로 명명됐다. 세계 최고 예술분야 명문고에서 배출된 졸업생들은 뉴욕의 브로드웨이로 진출해 영화, 연극, 오페라, 뮤지컬 분야의 유명예술인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결과는 한국의 재벌가에도 영향을 줬다. ‘아들은 하버드와 MIT공대가 있는 보스톤으로, 딸은 문화의 중심 뉴욕으로 보낸다’고 한다.
라과디아는 판사 시절에 공정하면서도 약자에게 우호적인 판결을 많이 내렸고, 정치인 시절에는 부정부패에 물들지 않고 청렴결백한 행실과 진보적인 성향으로 명성을 얻어 세인들은 그를 '뉴욕의 영웅'이라 불렀다. 이를 기념해 뉴욕 맨하탄 인근에 만들어진 공항을 라과디아공항으로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해남의 꿈, 장기적인 안목으로 라과디아의 지혜로운 삶과 청렴한 행적을 교훈 삼아 미래를 준비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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