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李晟馥)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실린 ‘그날’이라는 시의 한 구절입니다. 모두가 병든 상황임에도 아무도 신음 소리를 듣지 못하고 아파하지도 않을 만큼 일상에 둔감한 채 살아가는 불감증 환자 같은 나날을 그려낸 시입니다.
세상이 시끄럽기도 합니다. 여기저기서 실밥 터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디 한군데 성한 곳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요즘 보도되는 이야기들은 마치 막장 드라마 같습니다. 화가 나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는지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는 못된 버릇조차 생겼습니다. 그래 시인의 시가 어쩌면 우리의 현실과 엇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희망의 소리는 짧고 걱정과 한숨은 깊어가는 그 날,  신문, 방송에는 부패 소식이 가득한 그 날, 권력과 돈이 정의를 대신하는 그 날, 힘없는 민초들의 가슴은 회색빛으로 덧칠해져 가는 그날입니다. 비뚤어지고 어긋난 현실을 바라보며 컴퓨터처럼 ‘리셋(reset)’ 버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그날입니다.
한 나라나 어떤 조직들은 지도층의 모습과 지도력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기원에 관한 이견이 있지만 사전의 기록을  빌립니다.)
14세기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의 도시 ‘칼레’는 영국군에게 포위당합니다. 칼레는 11개월이나 완강히 저항했지만 결국 영국군에게 함락됩니다. 정예병력 3만4000명이 시민 8000명을 정복하는 데 11개월이 걸린 사실에 분노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주민 모두를 학살하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시민을 대표해 자비를 구하는 칼레시의 항복 사절단이 파견됩니다. 점령자는 “모든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그동안의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며 “이 도시의 대표 6명이 목을 매 처형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칼레 시민들은 혼란에 처했고 누가 처형을 당해야 하는지를 논의합니다. 모두가 머뭇거리는 상황에서 칼레 시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t Pierre)’가 처형을 자청했고 이어서 시장, 상인, 법률가 등의 귀족들도 처형에 동참합니다. 그들은 다음날 처형을 받기 위해 교수대 앞에 모였습니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죽음을 자처했던 시민 여섯 명의 희생정신에 감복해 이들을 살려주게 됩니다.
여섯 명의 지도자의 행동이 칼레를 구한 이야기는 역사가에 의해 기록되고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典型)이 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은 ‘명예(Noblesse)만큼 의무(Oblige)를 다해야 한다’,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뜻합니다.
우리 현실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너무 과분한 요구 같습니다. 위치 이탈을 한 시간이 이미 오래됐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롤 모델(role model)이 돼야 할 지도자 반열에 있는 이들의 면모를 보면 위법이 한두 가지 정도면 그래도 청렴 반열에 속한다는 위각(違角)난 현실, 허언(虛言)이 무성하고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들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서도 신음소리나 아픔은 없습니다. 모두가 중병(重病)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겠지요.
시인은「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후기(後記)에서 ‘아픔’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 어딘가가 썩어들어 가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이보다 더 난처한 일이 있을까? 문제는 우리의 아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있다’
우리는 대체로 아픔을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입니다’고.
지금 우리는 아픕니다. 제발 아픔을 모르는 무감각이라는 중병에서 깨어나기를 기도합니다.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입니다. 새롭게 시작할 오늘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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