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석 천(전 해남동초 교사)

지나가는 길에서 백발(白髮)의 할머니가 학생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계셨습니다. 할머니의 한 손에는 빗자루가 다른 손에는 길에 버려진 빈 음료수 캔이 들려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고. 학생 놈들을 이런 깡통이나 버리고… 즈그가 처먹은 것을 왜 길에다 버려. 주운 놈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그러더니 나중에는 불똥이 학교로 튕겼습니다. “학교 선생들은 이런 것을 안 가르치고 무엇 한가 몰라. 월급만 받아 처먹고”
평생을 학생들과 함께 살아온 제 귀에는 할머니의 말씀이 여간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공자(孔子)시대에도 소크라테스 시대에도 버릇없고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존재했습니다. 공자도 젊은 사람들에게 버릇이 없다고 꾸중하였고, 율곡 이이도 탐탁지 않아 했으니 시대를 막론하고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젊은이들이 부족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양심에 자극조차 받지 못하는 듯한 도덕 불감증 현상들은 흐느적거리는 사회의 단면 같습니다. 인성이나 도덕성보다는 지식만을 중시하는 사회,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편의적인 사회, 물질만능주의(맘몬이즘) 풍토가 만들어낸 자화상입니다.
‘학교 선생들은 이런 것을 안 가르치고’라는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마음에 담아놓았던 생각을 여기 옮깁니다.
교육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일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 그리고 튼튼한 몸을 가꾸는데 필요한 것을 깨닫고 체화하는 과정이 교육입니다. 그런 교육을 하는 곳이 가정이요, 학교요, 사회입니다. 그래서 가정, 학교, 사회를 교육공동체라고 합니다.
그중 학교는 ‘전인교육 곧 지·덕·체를 겸비한 조화로운 인간 양성’을 하기 위해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교육계획을 수립하고 실현하는 현장입니다. 하지만 유럽의 선진국들처럼 교육이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할 공공재가 아닌 상품화되고 일등지상주의를 지향하는 현시점에서 교육의 본질을 논의하기에는 눈에 보이는 장애물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육이란 크게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하나는 사람다운 사람, 즉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재능과 소질을 개성대로 살려 주어 사회에서 제구실하며 살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의 문제들의 근원을 캐고 들어가면 결국은 교육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잠재적 교육과정’이라는 교육 이론이 있습니다.
잠재적 교육과정이란 '학교에서 의도한 바 없으나 학생들이 은연중에 가지게 되는 경험들'이며 이러한 경험들은 학교 교육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모두 관련돼 있다는 이론입니다. 아이들은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나 가정에서도 수많은 것들을 보고 배웁니다. 눈만 뜨면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많은 사회입니다. 오늘도 양심을 거부하고 무질서와 부패와 부조리가 만연해 있는 허물어진 현장을 아이들은 보고 듣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인성교육’을 논한다는 것이 어쩐지 부끄럽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자녀교육에서 중요한 것, 세 가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는 본보기, 둘째도 본보기, 셋째도 본보기라고. 또 박완순 박사는 본보기가 최고의 인성교육이며 본보기란 ‘따라 보고 배울 틀’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스텐퍼드 대학의 반두라라는 학자는 인간의 학습에 관한 연구를 한 결과 사람은 본보기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머릿속에 남는다는 것을 발견했답니다. 우리 사회의 딜레마는 본보기(role model)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는 교육공동체가 제 역할에 충실하고 윗물이 본보기가 되며 사회 정의가 실현되는 곧 ‘기본이 바로 선 사회’가 밑바탕이 돼야 할 것입니다.
인과의 법칙에 따르면 잘못된 행위의 씨앗은 불행의 열매를 맺습니다. 내일 비록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의 말처럼 인성교육의 사과나무를 심을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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