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 재 희(북멘토)

정조의 죽음에 관한 것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이 독살설일 것이다. 독살설은 주로 남인 사이에서 유포됐다.
정약용(1762~1836년)은 ‘기고금도장씨여자사(紀古今島張氏女子事)’와 같은 글에서 정조의 사인과 관련해 독살설을 언급했다.
독살설이 유포된 결정적인 이유는 정조의 사망 이후 전개된 정치적 파란과 세도정치의 전개로 개혁정치의 향배가 정지했다는 것에 관한 아쉬움 아니었을까.
정조 승하 후, 11살밖에 되지 않은 순조가 왕위에 올랐다.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성인이 될 일정기간 동안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국정을 대리로 처리하던 일)을 시작했고, 정순왕후의 측근인 노론 벽파가 다시 정국을 주도하게 되며 세도정치가 시작됐다.
세도정치란 순종에서 헌종, 철종에 이르는 3대 60여 년 동안 국왕과 외척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 중심의 몇몇 가문에 권력이 집중돼 행했던 정치를 일컬으며 이렇게 권력을 얻었던 가문으로는 안동 김씨(김조순), 풍양 조씨(조만영), 반남 박씨, 대구 서씨, 연안 이씨 등이 있었다.
누군가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특정 가문에 편향된 등용문과 끼리 문화는, 결국 우리 국가를 파탄에 빠지게 하는데 일조를 했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고려 말 역시 친원파 세력이었던 권문세족에 의해 거대한 토지와 가혹한 세금 수탈로 백성은 고통을 받았다. 대동법 시행 이후 공인의 등장으로 상품 화폐 경제 발달에 혁혁한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치는 퇴보됐고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엄청난 경제적 발전을 하였고 지금 시대는 예전과 다르다고 하지만, 그것은 물질적 차원의 접근만을 봤기 때문 아니었을까. 개혁적 군주에게는 적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선의 역사상 가장 많은 암살 자객과 부대껴야 했던 왕이 정조였을지도 모른다.
루머와 찌라시, 음모설이 퍼진다는 것은 이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방증 아니겠는가. 그것은 정보의 접근에 있어서 소수가 쥐고 다수에게는 일방적 동의를 구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면 그것은 국가를 향한 국민의 불신이다.
저번 날 지진에 놀라고 오늘날 태풍에 또 쓰린 가슴을 쓸어내린 국민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퍼졌던 것이 미국이 북한을 공격한다는 설이었다. 인터넷상에 떠도는 이야기 인지라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요점은 국민이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다. 올바른 지도자라면, 그 불안을 달래주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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