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석 천(전 해남동초 교사)

대권 잠룡으로 불리는 어떤 분이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로 자신의 의중(意中)을 표현했습니다.
상선약수라! 이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물은 도(道)에 가장 가까운 것, 곧 세상에서 물을 가장 윗길 가는 선의 표본(標本)으로 여겨 이르는 말입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합니다. 공평하고 완전하고 상황에 따라 변하면서도 본질을 잃지 않으며 항상 겸허하게 낮은 곳으로 임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투지 않으며 장애물이 가로막으면 돌아가고 웅덩이를 만나면 참고 기다리다 그곳을 가득 채운 후 나아갑니다.
물은 결코 무리하는 법이 없으므로 허물이 없습니다. 최고의 선이 물과 같다고 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물은  얕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흘러 마침내 가장 낮은 곳, 바다에서 자기완성을 이룹니다.
인간이 더 높은 곳에 다다르기 위해 역류하려 몸부림치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물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4대강 사업이 생각납니다. 22조 이상의 엄청난 혈세를 쏟아부어 굽이굽이 흐르던 강을 뚝뚝 잘라 물의 흐름을 바꾸고 보를 만들더니만 환경 파괴라는 재앙만 자초한 것 같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물길을 바꾸고 보를 만드는 인위(人爲)보다는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놓아두는 무위(無爲)가 자연의 이치일진대 이를 거스른 일의 결과가 좋을 리 만무합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완만하게 곡선을 만들며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곡즉전(曲卽全) 곧 ‘곡선만이 완전하다’고 한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닐는지요.
상선약수라 말한 그분의 속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도 정치를 탐하는 심사거나 아니면 어지러운 정치 현실을 물에 빗대어 은근히 비꼬는 말일 것이라 해석했습니다.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 것 한 가지를 고른다면 저는 정치를 꼽고 싶습니다. 권력은 자식에게도 나눠주지 않는다던 옛말처럼 그것을 붙들기 위한 암투와 권모술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현실은 무너지고, 미래는 암울(暗鬱)합니다. 경제는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 우려되는 위기 상황인데도 컨트롤타워가 없습니다. ‘순실증 쇼크 상태’에 빠진 이 나라가 언제나 제 기운을 차릴지 막막합니다. 윤동주 님은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던데. 높은 자리에 있으면 심장이 그렇게 질겨지는 것인지, 질긴 심장 위에 또다시 아스팔트를 덧씌웠는지 도대체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헌정(憲政) 사상(史上) 추하고 부끄러운 흔적으로 남게 될 이번 국정 혼란 사태는 오직 권력욕과 사욕(私慾)에 사로잡혀 비정상적이고 망령(妄靈)된 길을 갔던 그들이 자초(自招)한 화(禍)임과 동시에 국민을 도탄에 빠뜨린 사건입니다. 이곳 땅끝까지 분노한 비등점(沸騰點)을 넘어선 민심을 어찌 역류하겠습니까?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이라더니… 권력의 흐느적거림이 추하게 보입니다.
이 나라는 비정상적인 사고방식(mentality)과 두 얼굴을 가진 지도자나 교언영색(巧言令色)을 일삼는 가신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는 고사성어처럼 저들의 진실은 표리부동했고, 저들의 충(忠)은 국민을 향하지도 않았으며 불의를 감싸기에 바빴고, 내 편이 아니면 ‘나쁜 사람’이라는 상식을 벗어난 이분법적 사고로 파당을 조성하고,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사건으로 국민의 자존심을 참담하게 무너뜨리고 국가의 위기를 자초했습니다.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은 세월호 사건, 역사 교과서 국정화, 고 백남기 사건, 일본과의 위안부 보상 문제, 개성공단, 사드, 최순실 게이트 등을 어찌 다 말하리오. 
우리 역사를 되돌아볼 때 임금은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고 신하도 신하 노릇을 올바로 할 때 세상이 가지런해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세워진 시대의 선비들은 독배를 마시면서도 임금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목에 칼을 들이대도 정의(正義)로운 말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후대들이 그들을 성군(聖君), 충신(忠臣)이라 일컫는 이유죠.
노자는 길이라 부르는 것이 다 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길을 이렇게 말합니다. ‘강물은 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걸까? 의인은 왜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까? 왜 참되고 살리고 영원히 푸르른 것들은 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 맨 끝자리에 있는 걸까?’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가장 낮은 곳은 어디일까요? ‘국민의 뜻’이 바로 그곳일 것입니다. 현인(賢人)은 내려가야 할 때를 알며 순리를 거스르지 않습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정치도 사람도 물에게서 지혜를 배울 일입니다. 그 길이 정의롭고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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