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 재 희(북멘토)

뉴스에서는 게이트 대상의 이름도 헷갈릴 정도로 수많은 사건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국민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다. ‘이게 나라냐’는 슬로건은 어린아이들까지 유행하는 노래 가사처럼 읊조린다. 이런 국내 상황에서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위기일까. 기회일까. 11월 27일 자 중앙SUNDAY에서, 윤영관(65·전 외교통상부 장관) 서울대 명예교수는 “역설적으로 트럼프 시대 한국 외교의 자율적인 공간이 훨씬 넓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강준만 교수는 저서「도널드 트럼프 정치의 죽음」에서 트럼프 현상을 미디어 현상이라고 말한다. 소셜네트워크 SNS의 활용이 정치권과 즉각적 소통을 원하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배운 사람’의 입장에서는 트럼프의 말이 논리적이지도 않고,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기득권 정치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트럼프의 ‘막말’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이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막연하게 저학력에 가난한 사람이라고 못 박았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미국 역시 중산층의 몰락이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이민문제와 ‘오바마케어’에 있어서 생긴 내부 불만은, 현 정권의 연장선을 유지할 힐러리 후보를 지지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었다. 더군다나 힐러리 e메일 스캔들은 트럼프의 입지를 굳히는데 결정적이었다.
트럼프의 정치 성향은 ‘오락가락’이었다. 그는 1987년까지 민주당, 1987~1999년 공화당, 1999~2001년 개혁당, 2001~ 2009년 민주당, 2009~2011년 공화당, 2011~2012년 무소속, 2012년 이후 공화당이다 그래서 트럼프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실용주의자라는 말도 나오지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 절충주의자 또는 기회주의자라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245p) 트럼프라는 사람의 정치노선을 정확하게 짚을 수 없다. 저자는 그 이유를 트럼프의 정치 경력에서 찾아냈다. 그래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층이 샌더슨을 지지했던 층과 묘하게 닮았다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철저하게 진보를 표현한 힐러리의 부정직성은 대중에게 용서할 수 없는 가십이 된 반면, 금권정치에 반대하는 트럼프의 연설은 리얼버라이티 쇼를 보는 것처럼 대중은 재미있어한다. 트럼프가 구사하는 언어는 쉽다.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분석이다. 정치 연설은 대학 강의가 아니다. 쇼맨십을 일반 대중들은 원한다. 언어와 지지율의 반비례 관계에 대해서도 저자는 심도 있게 봤다. 대학 수준의 언어를 사용했던 후보의 지지율은 턱없이 낮다 못해 지면을 뚫어야 할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트럼프가 미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을 뜻하지 않는다. 표면적인 이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냐는 질문이다. 우리에게는 트럼프가 없냐는 말로 되물어봐야 한다. 브렉시트 이후 세계는 갈수록 극단의 길을 가려고 한다. 쉽고, 재밌고, 흥분되고, 그리고 적을 만드는 정치 게임에 흥겨워한다. 달리 보면, 사고의 과정보다는 일차적 쾌락에 의존하고, 그것을 선동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자신의 민주주의를 내준다는 것이다.
정의를 강조한 시대에 가장 정의가 없었고, 창조 경제를 홍보한 현 정권에 창조는 없었다는 말을 대중들은 내뱉는다. 기득권 정치의 환멸에 기인한 것은 많은 요소들 중에 가장 큰 것이 서민 경제 몰락일 것이다. 갈수록 살기 팍팍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너무 쉽게 자신의 배를 불린다. 상대적 허탈감을 잠재울 수 있는 출구가 필요하다. 그 출구를 제시할 사람을 우리는 정치인이라 쓰고 리더라 부른다. 리더가 없는 시대에, 미국 국민은 트럼프를 선택했다. 참고로 윤영관 전 장관의 말에는 대전제가 있다. 트럼프 시대에 자율적인 외교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 국정의 쇄신과 안정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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