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양 원(해남읍 수성리)

맹자가 활동한 시대는 중국이 가장 혼란했던 전국시대로 강대한 나라의 군주들이 앞다퉈 인재를 구하던 시대였다.
한마디로 백가쟁명(百家爭鳴) 시대, 이에 전국시대 초기에는 노자. 공자. 묵자 등이 나타났고, 전국시대 중기에는 맹자와 장자가 나타났으며, 전국시대 말기에는 순자와 한비자가 등장한다.
공자는「논어」를, 그의 제자 증삼은「대학」을, 공자의 손자 자사는「중용」을 저술했고, 자사의 제자 맹자는「맹자」를 내놓아 4서(四書)가 성립됐다.
맹자의 출생 시기는 BC 372-289로 추정되며, 아버지가 4살 때 죽고, 홀어머니 장 씨가 맹자를 교육코자 맹모삼천(孟母三遷)을 행하고, 짜고 있던 베틀의 베를 끊는 단기(斷機)를 행해 삼천단기(三遷斷機)라는 위대한 교육을 실행했다.
맹자의 주요사상은 인의설(仁義說→성선의 심성론)과 그것을 발전시킨 왕도론(王道論→인의의 실현)이다. 맹자는 비록 종횡가와 같은 책략가는 아니지만 전국시대의 영웅다운 연출을 했다.
위나라(魏BC403-225)는 전국칠웅의 막강한 나라였으나, 혜왕31년에 진(秦)나라의 상앙이 이끄는 대군에 패해 700리 땅을 잃고, 도읍을 고도인 안읍으로부터 동쪽지역인 대량으로 옮긴 후부터 양(梁)나라로 불리게 돼 이로부터 위(魏)혜왕이 양(梁)혜왕으로 불렸다.
양혜왕(재위기간 BC369~319) 재위기간 53세의 맹자가 찾아왔다. “노 선생께서 추나라(鄒)에서 대량(大梁)까지 천리를 찾아오셨으니, 또한 장차 내 나라에 무슨 이로움이 있겠나이까?”
이에 맹자가 말하기를,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단지 인의(仁義)가 있을 뿐이오이다. 윗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서로서로 이익만을 쟁탈하려 한다면 나라가 위기에 빠질 것은 뻔한 이치올시다. 공의(公義)를 뒤로하고 사리(私利)를 앞세우는 풍조가 성행하면 그런 놈들은 임금의 모든 것을 빼앗지 않고서는 못 배기옵니다.”
다음 해 혜왕이 죽자, 맹자는 양나라에서 제나라로 찾아가 선왕(BC.319-301)을 알현했다.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나라의 탕왕이 나라의 걸왕을 토벌하고, 주나라의 무왕이 은나라의 주왕을 토벌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문헌에 확실히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신하 된 자로써 그의 임금을 타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요?”
“인의를 해친 자는 잔적(殘賊)일 뿐이요, 왕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이 아니라 잔적을 타도했다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군주라도 정치를 잘못하면 인민이 군주에게 항거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는 혁명사상가로 민중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맹자의 사상은, 그 하나가 군주라 할지라도 포악하고 아둔할 때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고 하는 ‘천명개혁(天命改革)’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民)이 가장 우선이고, 그다음은 사직(社稷.국가)이고, 가장 마지막이 임금(王)이라고 한 민본(民本)사상이다.
고려시대 정도전은 1377년 유배에서 풀려 선영이 있는 경북 영주에서 4년간 생활한다. 이때 정몽주가 보내준「맹자」를 하루에도 몇 번이고 정독하며 맹자의 민본주의 사상에 의한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이해했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 일등공신이 됐다.
「맹자」를 읽으며 자꾸만 현 시국이 오버랩 돼 씁쓸하기만 하다. 우리시대에 진정 맹자와 같은 인걸은 없음인가?

저작권자 © 해남우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