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 재 희(북멘토)

대의정치(代議政治)의 사망
우리는 87년 시민혁명의 결과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얻었다. 독재자를 몰아냈으니 이제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면 충분하다고 섣불리 믿어버렸다. 그러나 97년 IMF사태를 계기로 형성된 신자유주의 체제의 파도가 밀려왔고, 이 나라는 몇몇만의 동맹체로 존재해왔다. 국가를 사유화한 이명박과 박근혜, 최순실 일당들. 수십 년간의 정경유착으로 기형적으로 자기들의 배만 불려온 재벌, 권력과 돈에 기생하는 언론, 그리고 무기력하고 무능한 정치인들. 그들만의 리그에서 우리는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제 마음대로 난도질해도 상관없는 ‘벌거벗은 존재’가 돼갔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이 무기력한 삶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괴로워했다. ‘눈먼 자들의 국가’가 됐고,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었다’
정치의 복원 - 사회의 모든 문제는 정치문제다.
‘당신은 늘 옳다.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분하고 억울할 땐 소리쳐야 한다’ 우리는 또 한 번 시민혁명중이다. 지금의 한국사회를 바꿔낼 ‘광장민주주의’의 소중한 출현을 목격하고 있다. 더 이상은 고통, 슬픔, 무기력함을 삭일 수 없는 사람들, 왜 싸워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자신의 존재 하나하나가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것을 자각한 이들만큼 거침없는 이들은 없다. 일밖에 모르던 이들이 스스로 공화국의 시민임을 자각하고 떨쳐 일어났을 때의 에너지가 새 역사를 창조한다는 것을 광장의 시민들은 이미 알고 있다. 광장의 요구는 간단하다. “정의가 아니면 바꾸자”
이제 우리는 그들만의 이익동맹을 해체하고, 죽어가는 대의민주주의를 광장민주주의(직접민주주의)로 보완해 정치의 본래기능을 회복시켜야 한다. 단순히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우리가 ‘사람’임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든 불온한 기득권세력을 모두 갈아엎어야 한다.
필자는 광장민주주의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말 한 ‘진정한 정치’의 모습을 본다. 진정한 정치 또는 본래의 정치는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에 있다. 주체화란 지배 질서 안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자신들의 존재와 목소리를 보이게 하고 들리게 하는 것, 배제를 뚫고 일어서 자신의 언어를 되찾고 자신을 보이는 자리에 세우는 것, 정치적 대화와 권력의 행사에서 정당한 파트너로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랑시에르가 말하는 ‘본래의 정치’다. 즉 “목소리 없는 자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해 주는 일. 이것이 바로 진정한 정치고 광장의 정치다.” 또한 철학자 ‘고병권’은 “민주주의가 동의를 조직하는 일이 아니라 이견을 제출하고 차이를 생산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다른 의견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것이야말로 정치를 복원해 내는 첩경이다.
정치의 객체에서 정치의 주체로
이제 우리는 국가와 정치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그들에게 물어야 한다. ‘경제를 살려 줄 지도자가 뽑혔으면 좋겠다.’, ‘행복하고 싶다’라는 막연한 수동적인 통념대신, 국가에 정치에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
“너희들은 우리들의 의견에 얼마나 기속(羈束)돼 줄 것인가?”, “우리 사회가 바뀌기 위해서 꼭 필요한 정치적 이슈는 무엇이며 이를 해결해 주기 위해 싸울 수 있는 정치인은 누구냐?”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질문을 던진다면 우리는 더 이상 조작가능하고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우매한 정치적 객체가 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에 헌신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로 탈바꿈할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라는 명령에 저항하자. 중구난방(衆口難防) 토론을 하자.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묻자.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겠는가? 정치의 부활은 결코 기득권이나 현 정치권의 기만어린 술수가 아닌, 바로 우리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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