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희(북멘토)


공화국(republic)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라 전한다.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독재로, 제정(帝政)으로 치달을 때 여기에 맞서 자신의 나라 로마를 ‘공공의 것’(res publica)이라고 정의 한데서 비롯됐다. 국가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다수 인민의 것이라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공화국이란 공동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동의 참여와 공동의 결정으로 법을 만들어 통치하는 나라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 공화국의 현주소
근대국가, 대의제,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정치의 역할이나 시민의 덕성보다는 시장제도와 그 속에서 행동하는 개인의 사적영역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자유민주주의가 확대됐다. 그런데 문제는 자유민주주의가 확장되면서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약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사적(私的) 부분에 대한 옹호가 강조되면서 사람들은 점차 정치에 무관심해졌고, 이것은 정치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헌법 1조1항에서 말하는 우리 공화국의 현주소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말이 공화국이었지, 한 줌도 안 되는 그들만의 지배를 받고 온 것이 현실이다. 민주(民主)는 형식상 선거 때만의 민주였고, 그 민주를 실현할 공화국에서는 우리는 아무 목소리도 반영하지 못하고, 아무런 지배도 하지 못한 허울 좋은 민주공화국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순실, 박근혜 일당의 어이없는 지배가 통했고, 재벌의 왕국이 돼 우리의 정치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애국(愛國)이란 말도 결국 공화주의가 실현된 국가에서 적합한 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는 국정을 농단한 사람이, 그리고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이 애국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공화국의 정신이 몰각된 것은 우리 시민의 책임도 크다. 공적(公的)인 삶, 공공선(公共善)을 도외시한 큰 책임 말이다.
공화주의는 권리보다 의무를 강조하며, 권리도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본다.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공화주의는 사적인 삶보다는 공적인 삶을 사익보다는 공공선(公共善)을 중시한다. 나아가 공화주의의 핵심에는 ‘정치의 부활’이 있다. 자유주의는 개인이나 사적인 영역을 강조하면서 정치를 몰아낸다. 그러나 공화주의는 시민들과 괴리된 직업정치인의 영역이 아니라 시민들의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즉, 공화주의는 다양한 타인들과의 공존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소통하며 공동의 일을 숙고하고 결정해 나가는 가운데, 시민들이 정치의 주인이 되고 참다운 정치가 복원될 수 있다고 본다.
어떻게 공화주의를 복원할까?
도산 안창호 선생은 “황제란 주권자를 일컫는 이름이니, 대한민국에서는 온 국민이 바로 황제”라고 말했다. 이게 바로 민주공화국의 핵심이다. 우리는 이제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섬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주권자를 섬기는 노복(奴僕)임을 다시금 확인해야 한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어떻게 섬길지, 어떻게 공적인 영역에 시민들을 참여시킬 수 있을지를 연구하게 해야 한다. 참여로, 감시로, 촛불로, 탄핵으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우리가 주권자임을, 우리가 공화국의 주인임을 그들에게 각인시키고 스며들게 해야 한다.
2016년의 촛불혁명은 아직 시작일 뿐이다. 우리가 공화국의 정신을 망각할 때 그들은 또 그들만의 참여로 촛불혁명을 무력화 시킬 것이다. 우리는 이 주권자혁명이 완결 지을 때까지 그들을 감시하고 참여해야 한다. 민주공화국의 시민 되기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우리의 참여에 의해서만 민주공화국은 완성되는 것이다. 정치인들에게만 우리의 공화국을 맏겨 놓기엔 아직은 허약한 공화국이다. 끊임없는 관심과 참여 그리고 다원성(多元性)과 복수성(復數性)이 곧 새로운 공화국의 요체다. 광장의 언어가 공화국의 언어가 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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