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훈 (스피치 강사)

1913년, 런던 남부의 엡섬다운스에서 경마대회가 열렸다. “여성에게 참정권을!” 짧지만 강렬한 구호가 군중의 웅성거림에 묻혔다. 소리의 주인공은 전속력으로 달리는 경주마에 몸을 던졌다. 꽃다운 생을 마감한 에일리 데이비드슨의 이야기다.
필자는 2016년 6월에 개봉한 영국 영화『서프러제트』에 자연스럽게 각색된 이 이야기를 술회한다. 왜냐하면, 최근에 떠오르는 뜨거운 이슈인 18세 선거권 때문이다. 여성의 참정권에서 우리는 이제 청소년 참정권으로 관심의 축을 이동해야 한다.
청소년 참정권 문제는 1990년부터 있어 왔다. 특히 2015년에는 본격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그렇지만 2015년 19대 국회 막바지에 관련법 개정이 무산되면서 좌절됐다. 하지만, 최근 많은 청소년 및 청소년 기관, 단체가 중심이 돼 다시 추진되고 있다. 특히,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3일 “민주주의 역사는 참정권 확대 역사”라며 현행 만 19세 이상에게 부여한 선거권을 만 18세 이상으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해 청소년 참정권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보적 가치의 실현은 선거권 부여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이 과연 힘이 있을까?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이 있다. 불안정한(Precario)과 노동자 계급(Proletariat)을 합성한 신조어다. 자본과 기업이 필요할 때만 헐값에 고용했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나 손쉽게 버릴 수 있는 존재를 빗댄 씁쓸한 용어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존재가 도덕에 기초한 진보 프레임에 매력을 느낄까. 청년들의 문화라 불리는 서브컬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경화로 클릭 된 인터넷 사이트에서 활동이 그 예다. 그들은 진보 프레임을, 일회용 같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했을 때, 자신들의 불행한 삶을 지탱하는 기성체제의 하나로 치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청소년의 미성숙을 이유로 선거권 부여에 반대하는 주장도 살펴보자. 성숙과 미성숙의 판단 기준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누가 판단하는 것일까. 성인들은 성숙하게 투표를 했는데 어째서 오늘날 ‘최순실 국정농단’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는가.
세계적인 추세는 참정권에 있어서만큼 연령을 낮추고 있다. 2011년 기준, 전 세계 232개국 중, 선거권 연령 기준 18세 이하는 216개국이다. 비율로 따진다면, 93.1%의 수치다. 가까운 일본도 2015년 18살로 하향했다. 인도네시아는 17살, 오스트리아는 16살까지 하향했다.
올해 대선도 있지만, 내년의 전국동시지방선거 역시 우리는 고심해봐야 한다. 해남은 외부적으로 알리기 부끄러운 역사가 있지 않은가. 우리 안에 최순실과 우병우는 없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청소년 참정권의 문제는 보수와 진보의 가치라는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없다.
여성의 참정권을 이야기했던 20세기 초, ‘법률 앞에 인격의 동등함’이라는 용어를 생각해야 한다. 참정권의 문제는 기성세대가 청소년들을 인격적 주체로 볼 것인가의 관점이다. 사회적 시혜나 배려의 대상으로 청소년들을 낮추거나 객체로 머물게끔 하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의 주권자로서 함께 가야 할 공동의 주인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소년 참정권은 발현돼야 한다.
민주주의의 꽃이 투표라면 청소년 참정권은 참여 기회의 보장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떳떳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그에 걸맞은 투표권 행사야말로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는 참 민주주의 정신적 발현이지 않겠는가.
손자병법에 이런 말이 있다. 출기소필추(出基所必趨)이면, 출기소불의(趨基所不意)이다. 적진을 공격해 반드시 빼앗으려면, 적이 지키지 않는 곳을 공격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민주주의의 적은 누구일까. 해남군민의 자부심에 상처를 낸 것은 또 무엇일까.
상대방이 생각할 수 없는 판이 만들어지려면 새로운 부대와 참신한 계략이 필요하다. 이제는 더 이상 정당만 보고 인주를 습관적으로 찍었던 견고한 콘크리트 투표부대는 거부하고 싶다.
소셜네트워크와 다양한 매체와의 접근이 쉬운 청소년들이야말로 새 시대를 개창할 게릴라 부대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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