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석 천(전 해남동초 교사)

봄을 기다립니다.
온통 무채색이었던 겨울 들판에 다른 색깔이 덧입혀 지고 있습니다. 강남 갔던 제비가 때가 되면 돌아오듯 한데서 겨울을 건너온 것들이 수런거립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고 하죠. ‘봄’을 생각하다 아마도 봄의 어원이 ‘보다’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계절이 봄 아니던가요?
봄이 머물고 있는 앞집의 매화나무 곁에서 서성입니다. 꽃이 피기에는 아직 날이 남았지만 구례 홍매화가 보고 싶기도 합니다.
봄비가 내릴 거라고 하니 비가 그치고 나면 봄은 한 발짝 더 가까이 오겠지요. 무엇이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못하는 성미라서 미황사로 봄맞이를 갔습니다.
내가 봄을 기다린다고 봄이 빨리 오는 것은 아니지만 겨울과 봄 사이의 틈새엔 늘 설렘이 자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황사 경내를 돌았습니다. 새 생명의 들썩거림이 보입니다. 아직 산비탈엔 겨울바람이 진을 치고 있는데 언덕배기 곳곳에 봄기운이 푸릇합니다. 꾀 벗은 몸뚱이를 겨울바람에 내맡긴 채 안쓰럽게 서 있던 나무의 속살에 수액이 도는 것 같습니다. 기다림과 기대는 상통함이 있는 듯합니다. 나이가 들면 차분해지고 무덤덤해지기도 하련만 설렘은 오히려 커가는 것 같습니다.
겨우 인생을 알만한 나이에 다시 찾아준 봄이 새롭습니다. 봄은 봄을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에게 먼저 자리를 내줍니다.
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려줍니다. 봄을 깊이 있게 들여다 본 영랑은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고 노래했다는데 모진 겨울의 터널을 뚫고 싹을 틔운 봄이 너무 짧기만 해서일까? 내공이 빈약한 나에겐 영랑이 보았던 봄의 슬픔이란 것이 아직은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봄은 기다림만큼이나 찬란하고 화려하겠지요.
봄은 찬란합니다. 저는 아직 찬란한 여름, 찬란한 가을, 찬란한 겨울이라는 말을 들어 보진 못했습니다. 새 생명이 들썩들썩 기지개 켜는 봄만 찬란하다고 합니다.
봄은 너무도 찬란해서 언어로 표현치 못해 오히려 슬플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영랑은 역설법을 통해 벅차오르는 봄의 아름다움을 오히려 슬프다고 했을 것입니다.
우주의 기운이 가득한 봄을 보내기가 싫어 그 멀어짐을 슬픔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봄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봄을 기다리는 자에게는 봄이 더디 오는 것 같습니다.
봄을 기다린다는 것, 아직은 설레는 일입니다. 기다림은 ‘부재를 견디는 일’의 다른 말일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삶은 얼마나 푸석거릴까요? 봄뿐만 아니라 기다리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림은 서성임이고 뒤척임이니까요. 그건 삶의 윤기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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