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훈(농산어촌해남문화융합센터 소장)

 지난 26일 일요일, 무작정 진도 팽목항으로 향했다. 서망을 지나 팽목항까지 들어서는 길은 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추웠다.
갓길과 주차장은 언론사 박람회라도 열린 듯 중앙의 내로라하는 TV, 신문 취재 차량이 즐비하게 주차돼 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공중에는 헬리콥터가 떠 있다.
3년 전 기시감(데자뷰)을 느낀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창자가 끊어질 듯한 울음소리 대신에 추모객들의 느린 걸음이 분향소를 얼기설기 메우고 있는 것이다.
6825톤의 세월호는 지난 23일 약 3년의 세월 동안 동거차도 사고지점에서 수많은 의문점을, 침묵과 함께 가라앉아 있었다. 대부분의 희생자가 10대 고등학생이었으며, 아직도 9명의 미수습자가 남아 있다.

 팽목항의 짧은 부두에 걸린 현수막이 눈에 띈다. “미수습자 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세가지입니다. 첫째, 유실 없는 인양. 둘째, 온전한 인양. 셋째, 작업자들의 안전”이라는 문구다. 유실 없는 인양이라는 말에서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이 했던 말이 오버랩 된다. “사실 생존을 바라지만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위치는 유가족이 되는 것이다” 유가족이 되는 것조차 힘들다는 것이다. 3년의 세월은 기다려도 너무 기다린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이후, 갖가지 책들이 나왔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창비에서 출간한 『금요일엔 돌아오렴』이었다. 아이를 수학여행에 보내지 않았다면, 내가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슬픔은 없었을 것이라는 메시지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2014년 4월15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갈망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이런 먹먹한 마음 때문에 우리는 아직 추모할 수 없다.
추모(追慕)의 사전적 뜻은,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함이다. 비슷한 말로 추념이 있다. 아직 우리는 세월호에 있어서 그들에게 안녕이라고 완전하게 말할 수 없다.
세월호가 어떻게 침몰하게 됐는지 우리는 명확히 알지 못한다. 세월호에 탑승한 아이들을 왜 구할 수 없었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기상악화’라는 4음절이 지닌 뜻만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이 상황을 이해하라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검찰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했다는 뉴스 보도를 접했다. 침묵했던 7시간의 짙은 그림자가 벗겨지고, 헌법재판소의 보충의견처럼 헌법에서 보호하는 국민의 생명권에 대해 국가의 수장으로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길 갈망한다. 왜냐하면 하늘의 아이들에게 도착한다는 하늘 우체통을 통해 정말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진심으로 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이다.
조작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세월호가 인양되는 날, 어느 네티즌이 찍었다던 노란 리본모양 구름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슬픈 희망이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월호를 추념한다는 것은, 세월호의 진상을 밝히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는 이 땅에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목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뜻하기도 한다. 모두가 안심하고 자신의 삶을 이끌어갈 동력을 얻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세월호 유가족 및 미수습자 가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 역시 언제 어느 때에 비슷한 상황에 놓일지 모른다는 염려에 깃든 걱정이다.
세월호에서 탈출한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포옹을 하기 위해서라도, 이 땅의 어른들이 조금 더 정직해지는 그 날을 띄우며, 일요일에 대부분의 자동차는 진흙탕으로 얼룩진 민주주의 뒤안길을 빠져나왔다.
필자 역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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