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욱하(재경향우 수필가)

사랑하는 손자 산아!
너의 초등학교 3학년 진급을 축하한다.
네가 비록 베트남에서 살고 있다 할지라도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났다는 소식은 TV 뉴스를 보고 알고 있겠지.
지난해 네 아빠의 휴가를 틈타 너희 네 식구가 귀국해, 우리 집에서 잠시 기거하던 2017년 1월5일 주말 촛불집회에 우리 함께 참여했지. 그날 너는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을 처음 본다고 말했지. 그리고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너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이 모였어?”, “촛불집회가 뭐예요?”, “날씨도 추운데 할아버지는 무엇 때문에 빠짐없이 참석하세요?” 등 이런저런 문답 가운데 고산 할아버지와 이이첨 대감 이야기도 들려주었지.
 

 사랑하는 산아!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건의 시작은 2016년 9월 TV와 신문 등 일부 언론에 박근혜 최순실게이트가 드러나면서부터다.
일반 국민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국정농단 사실이 밝혀지자 대통령은 변명과 거짓말, 또 머리 숙여 사과도 했지만 어느 것 하나 진심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불법 부정 비리가 선명하게 드러나 2016년 10월29일 처음으로 2만여 명의 시민이 손에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모여들었다. ‘박근혜 대통령 하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함성과 손팻말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 작은 몸짓이 정권을 무너뜨리는 위대한 촛불혁명이 될 줄 누가 알았겠니? 추위와 함께 참여하는 시민은 늘었고 구호는 더욱 강렬해져 ‘박근혜 즉각 체포하라!’, ‘박근혜 즉시 구속하라!’로 바뀌었다. 살아있는 권력에 맞서 선뜻 나서지 못하던 국회도 천만 촛불시민의 힘을 입어 2016년 12월9일 국회의원 234명의 압도적 찬성으로 ‘박근혜 대통령탄핵소추안’을 가결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100여 명의 특별 검사 수사팀은 93일 만에 헌법재판소에 탄핵을 요청했다.
그리고 2017년 3월10일 헌법재판소 재판관 8명 전원 일치의 인용으로 대통령을 파면했다.
 촛불집회 시작한 지 133일, 19회의 집회에 1600만여 명의 시민이 참가한 촛불 혁명으로 탄생했다.
뒤돌아보면 촛불혁명은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웠다.
집회의 본질은 처음에는 시위였다. 품위와 질서를 지켰으며 결과는 혁명이지만 과정은 축제였다.

사랑하는 산아!
고산할아버지의 <병진소> 이야기를 한 번 더 들려주마.
 조선 15대 광해군 시대에 오늘의 법과 권력의 화신 최순실 같은 예조판서 이이첨 대감이 있었다.
그는 임금을 현혹시켜 국정을 농단하고 심지어 과거제도까지 전유물 삼아 자기의 아들 넷을 부정 합격시켰다. 이와 같은 국사의 전횡을 조정대신들은 알고 있었지만 권력 앞에 눈감고 입 닫았다.
그런데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학생)에 불과한 나이 30세의 고산할아버지께서 죽음을 무릅쓰고 임금께 낱낱이 상소하였다.
이때가 병진년 1616년 광해군 8년이라서 <병진소>라고 불렀는데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 110권과 고산유고집 제2권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 사건으로 고산할아버지는 7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이이첨과 네 아들 모두 인조반정 후 참수당했다.
 사랑하는 산아!
 오늘의 역사를 먼 훗날 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기록할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유사 이래 오늘의 촛불혁명 만큼 아름답고 품위 있는 혁명이 또 있겠느냐?
나는 비록 고산할아버지처럼 목숨까지 걸고 부정부패와 맞서지 못했다. 그러나 촛불집회를 못 본 체하고 남의 일처럼 수수방관하지 않는 모습을 네게 보여주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이 주인 노릇 하는 나라,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물려주고 싶어 엄동설한일지라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참여와 연대에 그쳤지만 멋진 할아버지로 기억해주기를 바라면서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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