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훈(농산어촌해남문화융합센터 소장)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권교체와 변화가 시대의 요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정권교체와 어떤 식의 변화냐는 구체적인 화두에 선뜻 대답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노선이 다르다. 신념이 다르다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하지 말자. 
해남의 선거 풍토를 보고 이런 말을 남긴 지인을 만났다. 
해남은 학연, 지연에다가 하나가 더 붙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경조사 인맥관리다. 
그 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정치 대표자를 뽑는 수준과 같다는 말도 함께였다. 몇 사람의 말을 일반화할 수 없겠지만 무시할 수 없는 맥락이다. 대선이라고 해서 다를 것인가. 
수많은 공약이 난무하는 읍 고도리 외곽도로에 즐비한 유세차량의 방송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게 한다. 이 말들이 공허하고 때론 외국어처럼 들리기도 했다. 
올 초 2017년 부처 간 협력 문화예술교육 지원 사업 일환으로 지역아동센터를 방문하면서 더욱 그러했다. 재잘재잘 떠들며 센터로 입실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거미줄처럼 끈끈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사회가 안아주지 않는 아이들이기에, 아이들은 스스로의 체온을 부둥켜안고 있다. 
제 살갗을 다른 아이에게 비비며 안기는 모습에서,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가 떠오르기도 했다. 
가슴에 금이 간 아이들은 낯선 어른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다 곧잘 어디론가 숨는다. 
책상 밑으로, 거실 한구석으로,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자켓으로 꽁꽁 얼굴을 감싼다. 
아이들의 형편대로 살아온 삶에서는 안 되는 것도 참 많았나 보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행복했던 때를 적으라고 하면 이렇게 써도 되냐고, 그림으로 표현해도 되냐고 묻는다. 차라리 질문을 하는 축들은 조금은 마음이 열려 있는 편이다. 
피로감이 짙은 어깨 굽은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7~80대 어른들에게서나 간혹 보이는 삶의 무기력도 느껴졌다. ‘나를 놀리니까 그 아이를 때렸어요.’ 마치 무용담을 자랑하듯 입담을 조잘되는 아이들의 생기에서 필자는 묘한 적개심이 일어났다. 그것은 아이를 향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낙인에 관한 것이었다. 
경제적 형편이 여의치 않은 아이들이 다니는 곳, 지적 능력이 떨어진 아이가 지내는 곳이라는 수식어로 지역아동센터를 그릇되게 가르친 어른들의 무지함에 대한 화였다.  
지난 2015년 5월10일자 한겨례 기사 「아동복지 늘려야 학대 줄어든다」를 봤다.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에 사는 만 0~14살 아동 10만명 당 0.4명 안팎이 매년 아동학대와 살인 등을 포함한 ‘고의 상해’로 숨을 거둔다. 
우리나라는 그보다 세 배가량 많은 1.2명에 이른다. 부모의 방임과 사고사 등을 포함한 ‘우발적 상해’로 봐도 우리나라는 북유럽 선진국들에 견줘 세 배가량 높은 아동 사망률을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것이 방임이다. 
지역아동센터의 이용은 2016년 기준 문턱이 더 높아졌다. 정부는 취약계층 아동으로만 한정하고 맞벌이 등 서류 증빙도 의무화하면서 갈 곳 없는 아이들은 거의 방치 수준으로 전락시켰다. 
더불어 부모의 소득 수준에 대해서도 차이를 두었는데, 중위소득 100%(3인 가구 357만원) 이하로 설정해 두었다. 이는 2015년 기준 기초생활 보장, 차상위, 평균소득 70%(3인 가구 309만원) 이하 보다 엄격해진 것이다. 
한국일보 2016년 3월16일자 기사「문턱 높인 지역아동센터, 갈 곳 없는 아이들 어쩌나」에서 김형모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학교 교사나 지역사회 전문가가 돌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기준과 상관없이 센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열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대선주자 유치원 어린이집 공약, 초등 돌봄 교실에 관해서는 별도의 것들이 있지만, 지역 아동센터를 염두해 둔 향후 정책 방향에 대해서는 갈피를 잡기 어렵다. 
문맥상 정권이 교체된다손 치더라도 방치되는 아동들에 대한 부담은 지자체에서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형편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논의를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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