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송산일대 당골판 사 정착
지금도 전통무(巫)로 천도

▲ 옥천면 송산리 함화자씨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해남의 마지막 세습무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각 마을을 담당하는 당골이 존재했다. 당골은 부모로부터 세습을 받은 직업으로 신분제사회가 낳은 제도이다. 어머니가 딸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전수했던 당골직업은 신을 몸에 받은 강신무와 달리 가족 대대로 세습됐기에 세습무라 칭한다.      
신분제 사회에서 출발한 세습무는 현재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지금까지 세습무를 계승하고 있는 이가 있다. 
옥천 송산리에 거주하는 함화자(76) 씨. 해남에서 지금까지 활동하는 마지막 세습무이다. 
함 씨는 친정어머니가 세습무 출신이다. 완도 넙도 출신인 함 씨는 16세 때 우수영으로 시집을 왔다. 시댁이 부잣집이라는 중매쟁이의 말만 믿고 시집을 왔는데 막상 와보니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집이었다. 

 우수영은 본래부터 논이 없었다. 농사라곤 밭농사뿐이고 물도 귀해 여성의 노동 강도가 가장 센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우수영으로 시집을 왔으니 매일 품을 팔아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딸이 걱정된 친정어머니는 쌀을 이고 딸 집을 찾아오곤 했는데 찾아올 때마다 쌀독을 두드리며 한숨짓곤 했다고 한다. 
친정어머니는 딸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고 판단되자 북일 좌일지역 당골판을 사서 딸에게 준다. 
당시 당골은 서로 간에 마을을 분담해 굿을 집행했는데 이런 제도를 ‘당골판’이라 한다. 
당골판은 철저하게 그 지역을 맡은 당골에게 소유권이 인정됐고 다른 당골은 이 안에서 굿을 하는 행위가 계율로 금지됐다. 이러한 당골판은 호남지역 무속의 특징이었고 매매가 가능했다. 
따라서 당골들은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될 경우 당골판을 팔고 이사 간 지역에서 새로 당골판을 사곤 했다. 

 완도 넙도에서 당골을 했던 친정어머니도 북일 내동 당골판을 사서 왔고 이어 딸에게도 좌일 인근 당골판을 사 준 것이다. 
북일 좌일지역 당골판은 친정어머니의 시이모 영역이었다. 시이모가 노환으로 더 이상 굿을 할 수 없게 되자 당골판을 내놓은 것이다. 함 씨는 친정어머니가 사준 당골판을 맡기 위해 20대 때 북일 갈머리로 이사를 왔지만 이전에 굿을 배운 바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먹고살기 위해 어깨너머로 굿을 배우기 시작한 함 씨는 굿의 사설과 징, 장구 등을 배워나갔고 배우는 동안 굿 의례가 들어오면 다른 지역 당골을 불려 굿을 집행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친정어머니에겐 굿을 배우지 않았다.    
친정어머니는 내동에서 김양식도 했다. 굿이 없을 때는 친정어머니의 김양식을 도우며 생활비를 벌었고 친정어머니의 당골판인 내동지역도 맡아 굿을 했다. 따라서 함 씨는 북일 갈머리에서 내동마을 인근으로 이사를 했다. 
우수영에서와 마찬가지로 북일로 이사 온 이후에도 남편은 술 속에 살았고 2남3녀인 자녀양육은 함 씨의 몫이었다.

 이후 친정어머니는 옥천면 영춘마을 인근 당골판을 사서 옥천으로 이사를 한다. 
옥천 영춘을 포함한 인근지역은 송산마을에 사는 무인이네라 불렸던 당골의 영역이었다. 무인이네가 도시로 이사를 가자 시어머니는 그곳의 당골판을 산 것이다.
 영춘 일대 마을을 상대로 굿을 행했던 친정어머니는 이후 북일에서 활동하던 딸을 이곳으로 부른다. 술독에 사는 사위가 새로운 환경에 오면 술을 적게 먹을 것이란 생각에 딸을 불러들인 것이다. 그리고 딸에게 영춘 일대 당골판을 물려주고 장흥으로 이사를 갔다. 이때 함 씨의 나이 33세였다. 
70년대 옥천면의 당골판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영춘을 중심으로 한 당골판과 학동마을을 중심으로 한 당골판이었다. 영춘일대는 무인이네에 이어 함 씨의 친정어머니, 함 씨가 운영했고 학동마을은 최씨 성을 가진 남편과 그의 아내인 정춘옥의 영역이었다. 
함 씨는 학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 부부와 굿 품앗이를 하며 굿 장단과 소리를 더 배웠다. 이 부부는 산이면 등으로 굿을 하러 다니는 등 당시 잘 나가는 당골부부였다.   
기독교가 대중화되기 전까지 각 마을에서 굿 의례가 많이 들어왔다. 또 정월대보름 때는 각 가정집을 돌며 액막이굿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간간히 굿 의례가 들어온다. 그것도 민원 때문에 마을에서 굿을 행할 수 없어 영암 월출산 아래 월암 굿당을 빌려 한다. 대부분 당골들도 영암 월암 굿당을 빌려 굿을 행하는데 주로 굿을 의뢰한 사람과 당골, 징과 장구 등을 치는 남자 2인 등 4명이 굿을 주관한다고 한다.
함 씨는 세습무 출신이라 씻김을 주로 한다. 성주굿, 선부리, 오구굿, 제석굿, 씻김, 길닦음 등 세습무의 무(巫)의식을 진행하며 죽은 자를 저승으로 인도한다. 
함 씨는 당골들의 활동이 활발했을 때 해남읍에선 안애임, 삼산면 일대에선 원진댁이 가장 잘 나가는 당골이었다고 회상했다. 함 씨도 이들 당골등과 품앗이를 하며 굿을 진행했다고 한다.
함 씨는 자신이 죽으면 해남의 당골문화도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철저히 세습에 묶여 부모의 직업을 세습 받아야 했던 세습무는 해방 후에는 세습보다는 생계를 위해 직을 계승했다. 
함 씨도 생계를 위해 친정어머니의 세습무를 이었고 친정어머니에 의해 당골판을 샀다. 
함 씨가 30대인 70년에 시어머니가 소유한 옥천 영춘일대 당골판을 사서 들어왔다는 것은 당골판이 이때까지 존속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함화자 씨는 해남 마지막 세습무이자 단골판을 마지막으로 운영한 당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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