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고주의와 집단주의가 상존해 온 지역사회에서는 주민 간 갈등이 일상사다. 그런데 지방자치시대가 되면서부터는 주민과 행정 간의 갈등이 두드러졌다. 쓰레기소각장, 쓰레기처리장, 도로건설, 버스터미널 이전, 시장정비 등 자치단체들이 추진하려는 개발 사업들이 주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제자리를 맴돌기 일쑤다. 
해남은 특히 어느 지역보다 공공갈등이 심각한 지역이다. 왤까? 해남반도, 화원반도, 산이반도 등 세 갈래 반도로 형성된 지리구조가 갈등이 많은 원인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자원이 풍부한 지역들에서 나타나는 공통현상이라는 설이 있다. 군이 여러 개 자원 중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 자원을 둘러싼 주민들이 반대하고 나서는 형국이다. 역대 군수들이 해남의 대표축제를 만들려고 했지만 합의도출에 실패했다. 방사능폐기장, 화력발전소 등은 찬성과 반대쪽이 첨예하게 대립한 결과 주민들이 수년이 지나도록 앙금의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런 공공갈등을 해소할 명약이 없을까? 최근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 재개 문제를 두고 설치된 공론화위원회 활동이 눈에 띈다. 공론화위원회의 공론조사방식이 우리사회 고질적인 공공갈등을 풀 열쇠로 떠오르고 있다. 
신고리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시민참여단 여론조사결과를 발표한 날 시민참여단에 참여한 한 사람의 인터뷰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저는 원전 건설을 중단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아쉬움은 없습니다. 많은 토론을 거쳐 얻은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서울 가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이 싸우면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이긴다는 속설처럼 목소리 큰 사람이 득세하는 게 우리네 풍조였다. 그런데 어떤 힘이 자신의 의지와 다른 결정에 승복하게 만든 걸까?
공론조사는 1988년 미국 스탠퍼드대 제임스 피시킨 교수가 고안한 새로운 여론조사 기법이다. 다수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문제를 놓고 토론하고 숙의하는 과정을 거쳐 결론에 이르는 방식이다. 공론조사는 자신의 주장을 펼 기회와 상대방 주장을 경청할 기회가 같이 주어진다.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 시민참여단은 한 달간 숙의 과정과 2박3일 합숙토론 등을 거쳐 가며 찬반 양측의 쟁점을 분석하고 마지막 판단의사를 표했다.

 지난 96년부터 경남 남해군이 시행한 ‘민원공개법정’도 좋은 벤치마칭거리다. 남해군은 장기간 해결되지 않은 집단민원이나 주민상호 간의 이해가 대립되는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민원공개법정’을 개설했다. 미국식 배심원제를 벤치마킹한 ‘민원공개법정’은 이해주민대표, 행정공무원, 지역전문가, 시민단체 등이 배심원으로 참여해 토론하는 가운데 합리적인 해결점을 찾는 방식이다. 
아울러 공공갈등의 요인을 보는 자치단체의 시각도 바뀌어야 한다.
자치단체공무원들은 주민들이 집단민원을 제기하면 집단이기주의로 몰아세워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민원을 수요자중심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행정을 집행하는 공급자중심으로 받아들이는 경향 때문이다. 

 자치행정은 결과 못지않게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에 지역 공공정책이나 공공사업을 추진할 땐 주민의사를 수렴하는 절차민주주의에 충실해야 한다. 공청회를 한답시고 일부 전문가들만 참석시켜 의사를 개진토록 한다거나 일부 전문가들로 한정하는 자문기구를 통해 주민 의사수렴을 가름해서는 안 된다. 정책과 사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부터 주민토론에 부치고, 이해당사자 대표들을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키는 것이 공공분쟁을 예방하는 길이다. 
지방자치의 생명은 절차민주의의다. 어떤 회의의 결과보다 의사결정과정을 더 중요시 여긴다. 지방자치는 인격체들이 모인 만큼 서로가 존중돼야 하고 다름이 인정돼야 한다. 따라서 군행정이 절차민주주의의 가치를 잘 수용하면 공공갈등의 해소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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