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훈(해남우리신문 시민기자)

 이제 12월이다. 내년 지자체장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이 물 위로 부상하고 있다. 군민광장에서 촛불로 맞이한 지난해 11월 말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쌀쌀한 바람에 감기가 가시질 않았던 지난 한 해였다. 
올해는 무엇이 달라졌나를 물었다. 가시적으로, 은행나무 잎이 적설처럼 쌓여 있고, 사람들은 ‘민주’라는 화두보다는 ‘일상’을 나누며 보도블록을 걸어간다. 
잃어버렸던 것, 잊혀져 간다는 것에 대해 종달 댈 필요는 없다. 삶으로의 복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만성토는 대회장을 차려도 될 만큼 지역문화예술계 명사들에게 심심찮게 나오고 있었다. 어떤 내용이건, 결론은 하나였다. 지역의 대표자가 문화에 해박한 분이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얼핏, 또는 서푼짜리처럼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농을 치듯 화법을 살폈다. 사회적 질서, 친교의 기능을 덧붙이며 ‘어색함’ 내지 ‘관계의 불편함’을 피하려는 듯한 피동형의 문장이나 주어를 생략하고, 무엇 하더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다. 
도시와 다르게 지역에서만 보이는 표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지역성에 근본을 둔 관계중심의 화법이 굳어진 것은 아닌가 하고 짐작할 따름이다. 
줄임말을 재미있어하는 아이들의 유행 지난 말을 빌려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서의 준말)’하면, 불편해도 지역의 좁은 인맥에서 다시 어울려 공동으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적도, 그렇다고 무시도 할 수 없는 관계에서 진전된 산물은 아닐까.
긍정적으로 살펴보면, 아직도 예전에 농업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의 문화가 살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개인의 창의성이나 개성보다는 집단의 문화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토론의 본질을 뚫고 세세하게 살필 수 있는 날카로움은 있을 수 없다. 원만하게 관계를 맺고 싶은 지역의 인사들은 말을 빙빙 돌리고 구체화하는 것보다는 스리슬쩍 피상적으로 문제의 상황을 설파하기에 급급하다. 

 당연히 대중은 공감할 수 없다. 말의 잔치에서 괴로운 것은, 서로를 얽어맨 관계였고, 여기에서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은 자웅동체가 된다. 
토론뿐만 아니다. 축사, 송사, 기념사 등에서 드러나는 식사(式辭) 화법도 두서없이 길다. 정돈되지 않는 원고와 ‘우리 잘했지. 나 대단하지’ 등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어우러진 일방적인 전달법은 행사에 참석한 사람을 살짝 괴롭히는 것 정도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고문과 흡사할 정도로 진저리치게 한다. 
속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내가 저 말을 왜 들어야 하지, 이 행사장에서 저 사람의 공연을 보러 왔지 저 사람의 수상실적을 듣기 위해 온 것은 아닌데’ 굉장히 불편한 생각이다. 
서술어가 길고, 객관적인 말하기 방식보다는 감정에 기대어 표현하는 방식인 우리 언어의 특징과 공과 사가 무너진 지역의 언어가 결합해 빚어낸 ‘돌연변이’ 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필요 이상의 감정소모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결론인즉, 어딜 가도 즐겁지가 않다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만 즐거운 것이 아닌, 각각의 개인들이 나름의 방법으로 웃으며 벙긋 드러낼 치아는 없는가. 고리타분한 관행이라고 하지는 말자. 
괜찮다. 조금씩 우리가 거북함을 안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 첫 번째가 문화에서 가장 기본인 ‘말’이라고 생각하고 이번에 꾹 찔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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