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해근(해남군의회 산업건설위원회 위원장)

 1.4km가 넘는 비행기 활주로는 공습으로부터 은폐가 되고 즉시 복구하기 위해 콘크리트가 아닌 잔디와 흙으로 만들어져 있다. 격납고에 사용된 거푸집은 판재를 조각조각 붙인 모형으로 황산 옥선창의 선별장에 남아있는 흔적과 유사했다. 72년 전 황산옥매광산 광부들이 강제 동원된 그 길을 따라 출발했다.
배가 침몰해 물에 수장되는 순간까지도 가족을 위해 아껴 가져온 식량배낭을 버리지 못하고 등에 지고 있었다는 아픈 이야기를 남긴 완도 청산도 앞바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광부들이 도착한 제주 서부의 모슬포항 인근, 강제로 징용된 광부들은 하선과 동시에 뿔뿔이 흩어져 채석현장의 진지구축에 투입됐다. 
일본은 제주기지 주변이 암반으로 이뤄져 있어 옥매광산에서 숙련된 발파기술자들이 필요했다.
당시 시설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알뜨르 비행장. 비행기 격납고와 비행장은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일본 관동군 7만5000명이 주둔한 제주의 송학산 주변 해안은 벌집같이 곳곳에 동굴이 만들어졌다. 이 동굴에는 어뢰를 설치하고 자살특공대를 배치해 미군함정에 대항했으며 어뢰 등이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게 레일을 깔았다. 이러한 갱도형 진지동굴은 성산 일출봉 등 제주도에 800여 개소가 있다고 한다. 

 동굴은 어뢰 안에 사람을 태운 인간어뢰 즉 자살특공 어뢰의 카이텐 기지와 합판배(자살보트)에 폭약을 싣고 함정에 자살 공격을 하는 신요기지로 나눠지는데 송학산은 카이텐기지로, 성산일출봉은 신요기지로 활용됐다고 한다. 아쉽게도 산방산과 송학산 동굴갱도는 침식이 되고 있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산방산 앞 사계해변의 검은 모래사장을 따라 유족들과 걸었다. 
아무도 없는 이 넓은 해안에 기약 없이 내려선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일본군 총 지휘소 본부가 있었다는 단산을 향했다. 동굴로 향하는 길은 잡목으로 우거져 찾기도 힘들었다.
200여 미터의 가파른 경사지에 올라서야 여기가 왜 지휘소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비행장을 비롯해 군사기지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이 겨우 비켜 갈 수 있는 통로, 머리만 조금 들어도 천장 암반에 부딪힐 정도의 높이, 안전목도 설치하지 않고 암벽을 정으로, 곡괭이로 굴착을 해 지휘소, 내무반, 관측소, 각 지역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촘촘히 만든 이곳이 당시 보병부대 주둔 장소였다고 한다.
동굴 속은 십여 분이 지나자 숨이 차 왔다. 천정에서 돌덩이가 떨어져도 대책이 없었을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3인1조가 돼 뚫고 쳐내고 깨는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운 이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주먹밥에 끼니를 때우며 기약 없는 노역을 했던 현장이다.
이곳이 옥매광산에서 온 광부들이 투입된 현장이라고 하니 울컥했다. 유가족들의 오열은 잠시 동안 그칠 줄 몰랐다
곳곳에 배어있는 착암기 자국과 정으로 파놓은 발파구멍의 흔적들 배당받은 작업량을 채우기 위해 당했을 고초를 누가 알겠는가?

 성산 일출봉으로 향했다. 몇 번의 관광을 통해 일출봉을 오르내린 적은 있지만 해안가에 이렇게 요새가 만들어진 줄은 까마득히 몰랐다. 갱도의 규모가 컸고 왕자 모양의 동굴도 있었다. 이곳도 옥매산 광부들이 투입돼 노동력을 착취당한 현장이다.
세계가 인정하는 아름다운 섬 제주, 그 속에 감추어진 슬픈 역사, 부모형제를 그리워하며 죽어갔을 강제 노역자들. 다행히 일본의 패망으로 귀향길에 오르지만 118명의 광부는 귀환하지 못했다. 
한때 정부도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지만 추진부서마저 없어졌다. 해남군은 올해 황산옥매광산 광부수몰사건에 관심을 갖고 지원조례를 만들고 위령제를 지낼 수 있도록 제비를 지원했다
옥매광산 광부수몰사건은 정부와 지자체의 관심과 지원이 중요하다. 또 관련 시설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 산 교육장으로 보전해야 한다.
황산옥매광산 광부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나서는, 제주도 동행 기회를 준 광주방송 관계자들과 유가족 그리고 해남우리신문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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