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모이고, 노래 부르고, 시 읊는 그곳이 나라 
고향 해남으로 글 농사 지으러온 윤재걸 할배 시인

▲ 고향 해남으로 돌아와 집필한 『유배공화국, 해남유토피아!』 출판기념식 때 출판소감을 밝히고 있는 윤재걸 시인.

 시인은 한 행을 쓸 때마다 온 얼굴로 웃었다. 때론 갈대가 미풍에 흔들리는 것처럼 잔잔하기도 하고, 때론 돌풍이 몰아치던 장마 때처럼 거세기도 하다. 
지독한 웃음은 시인의 인생에서 나왔다. 처음부터 웃음의 주인공은 시인의 것이 아니었다. 
 「작전명령–화려한 휴가」를 집필하던 시절에는 잔악한 군부의 군홧발이 조소의 주체였다.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서로 광주진압에 참가한 공수부대원의 수기를 바탕으로 쓰인 책이다.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은 철저히 국민들을 유린했다. 

 씨줄과 날줄이 엮인 감시의 포위망은 ‘자유’라는 대한민국의 속성까지도 짓이겼다. 검열관은 ‘불온사상’을 판단하고, ‘불온서적’에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도장을 찍었다. 79년에 쓴 시인의 두 시집『후여, 후여 목청 갈아』, 『금지곡을 위하여』는 그래서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다. 유신정권 시절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은 출판물은 출간되기 전에 금서가 됐다.  
따라서 의식 있는 대학생들은 다락방에서 이불 꽁꽁 싸매고 봐야 했던 시집이었다.  
“괜찮아요. 그래도 우리는 하늘하늘 여리지만 억센 생명을 지닌 풀처럼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누울 테니까요. 웃음이란 그들이 생각하는 축구처럼 뺏고, 뺏길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웃음은 기억하는 것이니까요. 우민화에 길들여 한 팔을 들고, 무릎을 굽혀 바짓단이 말아 올라가 발목이 보일 만큼 그들의 박자에 춤만 추지 않으면 돼요. 미국이 트럼프를 뽑은 것도, 우리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도, 모두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이지요”

 젊은 날의 강직했던 모습은 이제 한 장의 사진이 돼 그의 서가에 놓여 있다. 그는 고향땅 해남에 와서 30년 만에『유배공화국, 해남유토피아!』를 출간했다. 정권의 해악 없이 순산한 작품이다.   
햇볕도 들지 않은 그늘진 시멘트 숲,/ 홍진(紅塵)에 묻힌 삶 더 이상 싫어/ 글농사 지으러 고향땅에 왔소이다!// 육십이 넘어서도/ 뜻대로 살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은 목숨!// 자존(自尊)의 촛불마저 지킬 수 없는/ 서울의 노예생활 단칼에 베고/ 글농사 지으러 고향땅에 왔소이다!// 썩은 나라 썩은 인물 뒤로한 채/ 붓 한 필, 칼 한 자루 달랑 메고/ 글농사 지으러 고향땅에 왔소이다!//「글농사 지으러 왔소이다!」중.
정보부와 보안사를 넘나들며 척추가 두 번 부러지면서, 꿈은 미완성으로 남았던 것일까. 예전과 같지 않은 심장의 게으름에 아득하기도 여러 날이었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제 고향으로 돌아와 산란을 시도하듯, 시간이 허락한 삶을 추스르고 시를 잉태하고 싶어 찾은 고향 해남.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삶에서 추구하는 자연의 소리, 생명의 소리를 가만히 앉아 수확할 수는 없었다. 비록 주변에서 시인을 꼬장꼬장하게 볼지라도, 시인은 ‘화’를 내야 했다. 그 화는 결국 웃음을 지키고 싶은 수문장의 노력이었다. 웃음의 가해자와 웃음의 피해자가 동어 반복 같고 모순 같을지라도, 그것은 조소가 아니다. 그것은 고향 땅에 살고 있는 금싸라기 같은 사람들의 것이어야 했다. 웃음은 냉소여서는 안 된다. 조롱이어서도 안 된다. 아이같이 천진난만한 웃음만이 웃음의 순수였다.
해남 땅에선 두려움 없이/ 새로운 공화국이 일어선다.// 고산(孤山) 공화국에 이어 오늘은/ 남주(南柱) 공화국의 나라깃발이 펄럭이는 날// 쫓기고 쫓기어 벼랑 끝에 다다른/ 귀양 유민(流民)들의 열망이 한데 뭉쳐// 어느 날 함께 잡고 오를/ 튼실한 개벽(開闢)의 동아줄을 엮고 있다// 위대한 저항의 선각(先覺)들과/ 위대한 반골의 전사(戰士)들이// 이승과 저승 넘나들며/ 시대의 비문(碑文) 거듭 새기는 까닭// 새 나라, 해남공화국 세우기 위함일지니!/ 참 세상, 해남유토피아 열기 위함일지니!/「유배공화국(流配共和國), 해남 유토피아!」중.  

 김남주 시인의 혼백이 살아 있는 삼산면에서 시인은 유배공화국, 해남 유토피아를 낭송했다. 만국기가 펄럭이는 그 조그마한 생가는 흡사 새로운 나라와 같았다. 사람이 모이고,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는 그곳이 나라였단다. 
스스로를 귀양다리라 일컫는다. 귀양살이하는 사람을 업신여기는 말이다. 그러나 그 업신은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다. 번듯한 새 세상은 소외나 멸시가 공존해서는 안된다. 각각의 인생이 오롯이 담겨 있어야 한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인 ‘허벌나게 좋은 시상’은 옛날 견훤이 올린 후백제의 깃발이 아니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자긍심이었다. 해남은 하늘이 점 지어준 너른 곡창지대가 있다. 남의 것을 뺏을 줄 모르는 순박한 농사꾼들의 후예들이 외치는 구호였다. 유토피아, 만세!
사내의 굳게 닫힌 뇌리의 문,/ 초인종 몇 차례 눌러보지만/ 도대체 응답이라곤 없어.// 꿈의 사냥터 밤새워 배회하다/ 뒤늦게 꿈꾸기 시합에 빠진/ 집주인의 고집스런 성격 탓일 게야.//…// 집주인은 동틀 녘에서야/ 굳게 닫힌 의식의 문 활짝 열고// 오오래 기다린 내연녀 껴안고는/ 저 심해의 바닥으로 함께 줄행랑친다.// 「야행성(夜行性) 4」중  

 이제 시인은, 몸은 토막잠을 자더라도 꿈의 시합을 하고자 한다. 그 꿈은 혼자만의 영욕을 위한 것이 아니다. 몇 차례 눌러보는 초인종 소리처럼, 오감으로 웃음의 신호를 받을 것이다. 가끔은 검푸른 망망대해처럼 명치끝이 먹먹해질지도 모른다. 그럴 때일수록 시인은 목소리에 힘을 준다. 발바닥에 힘을 주어 땅을 지탱한다. 시어 하나에 마음을 담았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사람 한명 마다 차가운 눈을 헤치고 돋아나는 동백꽃처럼 그리운 웃음을 활짝 피우지 않을까 하는 믿음으로.
 

 윤재걸 시인은 1975년 8월 한국문인협회가 주관한 월간문학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고 저서로는 우상의 나라(1984년, 청사), 분노의 현장(1985년, 수레), 작전명령-화려한 휴가(1985년, 실천문학), 후여후여 목청 갈아(1979년, 평민사), 금지곡을 위하여(1984년, 청사) 등을 집필했다
또 75~80년 근무한 동아방송에서 신군부에 의해 해직됐고 이후 가까스로 복직한 동아일보에서도 해직된다. 89년 한겨레 기자 시절엔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으로 구속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윤 시인은 2001년 4월에는 민주화보상심의위로부터 민주유공자(1980년 8월 동아일보 강제해직 건)와 민주상이자(1971년 10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배후조종 고문후유)로 인정받았다. 현재 고향 옥천면에서 집필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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